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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타전하다

꿍이와 엄지검지 2009. 6. 5. 19:57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