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주목한다 - 찔러가는 방식으로 질문하기 / 김남규
이 시집을 주목한다
찔러가는 방식으로 질문하기
- 김영주, <미안하다, 달> (이미지북, 2012)
김남규
0. 질문들
온몸으로 밀고나가야 하는'힘의 시'를 보여준 김수영에게 있어 시란 언어 사용의 한 특수한 형태가아니다.
그에게 있어 시는 언어 자체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언어란 존재와의 순수한 만남이자 하나이므로,
시어에 내재된 상상력과 그 힘에 의해서 존재와의 순수한 만남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오염되었고, 그 타락과 왜곡으로 인해 언어 속에 깃든 존재 자체가 은폐되었다.
결국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오염되는 '과오'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일, 태초의 순결한 언어로 회귀하여 본질로 되돌아가는 일에 충실한 주체가 바로 시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조-시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 혹은 미학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문학 장르이며 역사가 깊다고 해서 그와 같은 질문의 필요성을 무화시키거나, 애써 담담한 척 외면한다면
시조의 장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위기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파고들어가야한다.
요 근래 흔히들 '소통불가능성의 현대시'에 대한 '처방전' 혹은 '항체'로 시조를 거론하고 있지만,
여기서 시조를 주목하는 것은 단지 언어 경제성에 따른 '짦음'이다. 그 이상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시조에서 '시-다움' 혹은 '시적인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시조-다움' 혹은
'시조적인 것'에 대한 답변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제 우리에게 문제는 '무엇을 써야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하는가'이다. 오염된 언어에서
순수한 언어로, 언어의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는 세계의 본질과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 보일 것이냐 혹은 숨길 것이냐가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이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 시조 미학을 정립해 나가는 것 또한 시급하다.
비밀에서 이야기로 - 김영주, <미안하다, 달>
잠이 덜 깬 새벽녘 유리컵을 닦다가
살과 살이 부딪히며 비명을 내지른다
순간을 놓아버린 손 바르르 떨고 있다
부서진 살점들이 가슴에 와 박힌다
손때 묻은 이야기가 거품처럼 사라진다
숨소리 귀에 환하다 빈자리만 차갑다
잃어버린 아픔은 그러모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붙들어둔 은밀한 욕망이다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이 아침
버리고 못 버리는 미련조차 짐이다
가벼운 아주 가벼운 비밀하나 가져갈 뿐
살면서 손바닥 위에 건져 놓은 손금
- 김영주, <그 아침의 비밀> 전문
설거지 도중 유리컵이 깨졌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그 깨진 순간은 하나의 '사건'이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에서 화자는 "부서진 살점들"이 가슴에 박히는 것과 "손때 묻은 이야기"
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제 그는 '기억'의 방식으로 시간을 거스른다. 현재
로서의 과거, 현재로서의 현재, 현재로서의 미래가 모두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의
방식으로 화자에게 현현한다. "잃어버린 아픔은 그러모은 시간"이며 그것은 "은밀한 욕망"으로서
붙들어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과거는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고,
"손바닥 위에 건져 놓은 손금 하나"로서 "가벼운 아주 가벼운 비밀 하나"만 남는다.
유리컵이 깨지는 사건에서 화자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야기로서의 과거는 현재에서
비밀이 되기 때문이며, 이제 다시 미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누가 또
달, 너만큼
천의 얼굴 가졌으리
네 둥근 품안에 든 무량한 이야기들
하나
둘
꺼내다보니
그 비밀이
적지 않다
-김영주, <미안하다, 달> 전문
시집의 표제작 <미안하다, 달>에서 화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달에서 "무량(無量)한 이야기들"을 본다.
"저마다 / 그릴 수 없는 소리로 / 경을 읽고 있는" (<백담사 가는 길>)이 세계에서 저마다 비밀의 형식으로
사정이야기를 품고 있다. 무월광에서 만월에 이르는 달의 반복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지시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부재의 매혹을 견디는 방법은 결국 비밀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시조 작품이라고 할 때, 규정할 수도 없고 규정되지도 않는 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행위,
그것만 남는다.
김남규
1982년 충남 천안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1세기시조 동인
- <<시조시학>> 201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