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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우리 민족의 양식적 원형 / 홍성란

꿍이와 엄지검지 2013. 10. 11. 13:29

 

시조, 우리 민족의 양식적 원형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서정주 〈문둥이〉

알다시피 〈문둥이〉는 현대 자유시를 대표하는 거장, 미당 서정주의 자유시다. 미당은 《현대시조》 창간호에 2수의 연시조를 축시로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은 시조로 발표한 것이 아닌데, 시조의 양식적 원형과 일치하고 있다. 각 연은 초장 중장 종장에 해당한다. 1연과 2연은 장을 구 단위로 나누어 각각 2행으로 표기한 것과 같다. 3연은 종장 전체를 하나의 행이면서 연이 되게 하여, 이 자유시는 3연 5행의 시적 형식을 취한 현대시조와 같은 율동 모형을 보여준다. 게다가 종장 첫 음보를 3음절로 고정하고 둘째 음보를 5음절 이상으로 하여 과음보로 실현하는 시조의 까다로운 율격장치마저 실현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미당은 시조라는 전통 양식의 운율이 표출된 자유시를 무의식적으로 쓴 것이다. 이는 시조라는 정형양식이 까다로운 형식규율로 존재하는 구속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내면에 잠재된 자연스러운 시적 형식임을 증언해 준다(김학성 〈시조의 양식적 원형과 시적 형식으로서의 행·연 갈이〉 《2010 만해축전자료집》(중) 이하 참조).

 

해와―∨ | 하늘빛이  ∥ 문둥이는  | 서러워∨  
  4모라          4모라            4모라           4모라

보리밭에 | 달 뜨면∨ ∥ 애기 하나 | 먹고―∨
  4모라         4모라             4모라          4모라
 
꽃처럼 | 붉―은― 우름을∨ ∥ 밤―새―  | 우렀다∨ ① 
  3음절        8모라                  4모라            4모라

 

①은 〈문둥이〉를 시조의 3장 형식에 따라 배열하고, 4음4보격의 정형율격에 따른 율동모형을 분석하면서 하나의 마디(음보)를 구성하는 율격자질(음절+장음+정음)의 양을 표시한 것이다(시조의 율격은 종장 첫마디 3음절 고정을 제외한 나머지 마디는 음량률). 미당 작품에서 보듯이 시조의 율동형은 우리 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어, 언제든 자연스럽게 현재화되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우리 민족의 대표시가 될 수 있는 여건을 충족하고 있다.

 

시조의 행갈이와 연 구성

 

미당이 자유시의 율동형을 시조 양식의 운율로 표출하듯이, 현대시의 한 양식으로 창작하는 현대시조 또한 시조의 양식적 원형을 율동모형으로 가져와 시행발화는 시조의 맛을 내되, 멋스럽게 가져갈 수 있다. 현대시조가 아무리 ‘시조의 양식적 원형’을 선택해 온 것이라 해도 현대인의 모든 사유, 모든 감정을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듯이 형식모형을 강제할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조동일은 《역대시조선》을 엮으면서 다양한 행갈이를 시도한 바 있다. 고시조는 가곡창이나 시조창이라는 음악적 형식으로 실현되었으므로 노랫말을 어떤 형식모형(시적 형식)으로 제시하느냐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지만, 듣는 시(시노래)가 아닌 읽는 시(노래시)로 감상하는 현대시조에서는 개별 작품의 시행발화가 필연적임을 반증하는 사례다.

 

한 자 쓰고

눈물지고
두 자 쓰고
눈물지니

 




行이
水墨山水 되겠구나

 

저 님아
울며 쓴 편지이니 휴지 삼아 보소서 ②  

 

②는 조동일이 고시조의 율동형을 가져와 시적 형식으로 재배열한 시행발화다. 이 시행발화가 고시조의 악곡표지에 따른 시적 분위기가 반영되었는가는 논외로 하고, 일단 고시조를 노래가 아닌 시로서 읽게 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3장의 시조창과는 달리 5장의 가곡창 방식을 따른 5행 배열의 시적 형식을 적용해 보자. 

 

한 자 쓰고 눈물지고                              초장
두 자 쓰고 눈물지니                               2장

字字 行行이 水墨山水 되겠구나            3장                  중장(3장)

저 님아                                                   4장


울며 쓴 편지이니 휴지 삼아 보소서 ③  5장    

 

③의 오른쪽 표지는 가곡창 방식의 노랫말 배분을 가리킨다. 초장을 구 단위의 2행으로 나누고, 중장을 장 단위 1행으로, 3음절 정형의 종장 첫마디를 독립시행으로 하고 나머지 마디를 1행으로 하여, 5장 형식의 가곡창 방식으로 시행을 배열하고 연을 구성하니 이 작품의 악곡표지인 이삭대엽 혹은 계락(계면 낙시조)이라는 악곡표지와도 잘 어울리는 시적 형식이 되었다. 고시조의 이삭대엽은 ‘아주 느린 장단으로 부르는 반듯하고 단아한 음악의 대표곡이고 계면 낙시조는 그 근엄함을 어느 정도 풀어버리고 흥겨움을 보이기는 하나 그것이 가곡창의 계면조로 불리는 한 상당한 품격과 슬픔의 분위기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어서 경박해 보이는 잦은 행갈이’를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작품의 시적 정조에 맞게 된 것이다.

  

현대시조의 행갈이와 연 구성

 

읽는 시조로 전개되는 개화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시조창의 영향으로 3장을 율격행 그대로 표기했고, 근대시조로 이행하면서 구 단위 6행(대표적인 예는 육당의 경우)에서 장 단위로 연을 구성하고 행을 배열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대표적인 예는 조운의 경우). 전후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현대시조라는 이름에 걸맞은 다양한 시적 형식이 나타나게 되는데(장순하의 〈고무신〉과 이영도의 〈아지랑이〉 등) 이러한 시적 형식 모색의 진전은 시조가 본격적인 시로 인식됨으로써 서정시로서 시조가 어떤 시행발화로 제시되어 시적 율동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현대시조의 시적 형식은 대체로 작품의 시행발화를 시조의 율동모형에 따라 표현하는 정통형과 시인의 정감적 분위기와 어조(tone), 감성적 결(texture), 발화상의 의미 비중, 시각적 효과 등에 따라 다양한 행갈이와 연 구성을 보이는 변화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초중종 3장시조의 정체성을 파기한 파탈형은 논외로 한다). 

 

율동모형을 따른 정통형

 

시적 형식으로서 정통형은 자유시와 시조가 공존하는 우리 시대에 양식적 정체성을 잘 살려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장 단위로 행을 배열하여 3장시조를 3행의 시행배열로 보여주거나, 장 단위로 연을 구성하는 경우이다. 더 나아가 소극적이지만 마디(음보 또는 시어)를 분할하거나 구 단위로 행을 배열하거나 음보단위로 행을 배열하여 연을 구성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5장의 가곡창 방식으로 행을 나누고 장 단위로 연을 구성한 정통형 기사 방식의 개별발화(홍성란 〈들길 따라서〉 《시인수첩》 2012년 가을호)도 문제 삼는 한국 시단에서 양식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시적 형식 모색은 무시할 수 없는 과제다. 가곡창 방식의 시적 형식을 문제 삼는다면, 침대에 맞추어 발목을 잘라내듯이 시조창 방식의 3장을 율격행으로 하여 3행의 판박이 작품시행을 만들라는 말이다. 더욱이 현대인의 개성은 도외시하고 ‘시조 관련 단체나 영향력 있는 시조 시인들이 능동적’으로 ‘시조 형태를 도출하여 동일한 규범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 문제 제기에는 시조의 율격, 형식의 개념, 율독과 낭독의 차이 등 그 밖의 많은 논란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만해축전 시조학술세미나의 과제로 삼기로 한다.  

 

첫서리가 샛빨간 감잎에 앉았습니다      

쭈글쭈글한 가슴으로 달에게 젖을 물린       
대봉시 감분 같은 어머니                  
단풍 한 잎이 눈물입니다 


     —임성구 〈감잎 단풍〉(《유심》 2012년 1월호)

 

   
임성구

초장과 중장은 장 단위 1연 1행으로 배열하고 종장은 구 단위 1연 2행으로 배열한 3연 4행의 〈감잎 단풍〉은 연 단위 장 구분으로 시조의 맛을 낸 작품이다. “대봉시 감분”은 “샛빨간 감잎에 앉”은 “첫서리”다. 만추 이미지 말고도 이 작품에는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어려 있다. 오래오래 간직해온 어머니 생각이 들어 있다. 가을도 다하여 “쭈글쭈글”해진 “대봉시”가 “달”에 닿아 있는 풍경이 아기에게 “쭈글쭈글한 가슴으로” “젖을 물린” 어머니 형상으로 다가오는 시인. 젖을 물릴 나이의 어머니 가슴이 쭈글쭈글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옛적 배고픈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도 나지 않는 쭈글쭈글한 빈 젖을 물린 건 아닐까. 형식적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이 깨끗한 단시조는 길고 먼 이야기를 간명하게 묘사했으나 시인의 연연한 사모곡이다.   

 

 

 

 

 

집도 없어                 
벽도 없는
눈 덮인 구룡마을 

 

뜬눈으로 토옥 톡!          
문 두드리는 소리 
     
으깨진                     
매화꽃 멍울
선지피가 묻었다   

 
     —황영숙 〈2월〉(《서정과현실》 2012년 하반기)

 

   

황영숙

〈2월〉의 행 배열(음보 단위 또는 구 단위)과 연 구성(장 단위)도 시조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시적 형식이다. 이 작품에는 구룡마을의 비극이 얼비친다. 서울시 강남구 끄트머리 구룡산 자락의 무허가 판자촌이 헐리고 잔해만 남은 마을에 눈이 내렸다. 고난의 세월도 세월은 세월이라, 뜬눈으로 살아온 눈 속의 매화가 “토옥 톡!” “선지피” 같은 꽃망울을 “멍울”멍울 터뜨린다. “매화꽃”은 “구룡마을” 사람들의 “으깨진” 삶을 표상한다. 초장의 경(物象, 눈 덮인 구룡마을)과 중장(뜬 눈으로)과 종장(으깨진, 선지피)에 담긴 정지(情志)로 어두운 사회상을 선명하고 단아한 의상(意象, image)으로 포착했다

연일 비를 맞고 드디어 말문을 연다
낡은 베란다에서 부엌 작은 창문에서
똑,
똑,
똑,
족히 한 되쯤 지난날을 쏟는다

 

네 아빠도 아니고 네 엄마도 아니고
이 집은 누구 꺼? 손자에게 묻던 아버지
이십 년 봉인을 뚫고 그 목소리 들린다

 

죄고 사는 일보다 틈도 둘 줄 알라고
어둠 저편에서 내 등을 다독이듯
톡,
톡,
톡,
아버지 전언이 건너오는 밤이다 

   
  —권영희 〈집의 말〉(《나래시조》 2012년 겨울호)

 

   
권영희

〈집의 말〉은 각 수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평시조의 연결체이면서 다음 연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장마철인지 연일 비가 내려 부엌 창문 앞에, 베란다 쪽에 갖다놓은 대야에 낙수가 한 되쯤 고였다(첫째 수 1연). 지난날 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손자에게 농조로 이 집이 누구 거냐 물으셨나 보다. 낙숫물 소리에서 이십 년 전 그 목소리를 듣는다(둘째 수 2연). 낙숫물 소리에서 깨우친 건,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마음의 여유는 갖고 살라 하신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마음을 노크하듯 다시 전해오는 것이다(셋째 수 3연). 종장 첫 마디 3음절을 낙숫물 떨어지는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하향 이미지에 따라 3행으로 배열하여 맛깔스럽다. 재밌는 건 “똑,/ 똑,/ 똑,”과 “톡,/ 톡,/ 톡.”으로 낙숫물 소리를 변주해내며 금속성 용기와 비금속성 용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 등을 다독이는 아버지 전언은 부드러운 비금속성이다.

 

개성적인 변화형

 

생각은 말의 알맹이요, 말은 생각의 그릇이라 할 때, 말 속에는 생각이 담기고 생각은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된다. 생각 없이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려 깊지 않았음에 대한 변명이다. 불립문자라 해도, 요동치는 마음이든 고요 적적한 마음이든 유동하는 정서를 시인은 언어문자로써 담아낼 수밖에 없다. 시조에 멋을 담아 시조의 맛을 낸다고 할 때, 생각으로 마음을 닦아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에서 솟아나는 슬기로써 시인은 시를 짓는다.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김원각 〈달팽이의 생각〉(《시조춘추》 2012 하반기) 

 

   
김원각

초장과 중장을 장 단위 1연 1행으로, 종장을 구 단위 2연 2행으로 하여 4연 4행의 시적 형식을 취한 이 시조에는 두 마리 달팽이가 등장한다.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라고 말하는 달팽이와 뒤따라가는 달팽이. 달팽이는 전속력으로 달려도 느림보의 대명사라는 별칭을 면할 수 없다. 이 달팽이들에게 “출발”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슬며시 웃음이 난다. 점입가경. “우리 둘밖에 안 보여”도 “걱정” 말라며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라는 대화. 달팽이 등에 얹힌 달팽이집에는 도저히 사려 담을 수 없는, 뒤에 가는 달팽이의 발화는 대수롭지 않게 우주적 발상에 닿아 있다. 허를 찔린 듯, 이 묘한 쾌감은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견자의 슬기다. 장 구분 의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뒤에 가는 달팽이 말인 종장을 2연 2행으로 한 것은 안 보이는 달팽이들이 어디 못 가고 결국 지구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열다섯 살 순이의 파랗게 질린
‘엄마!’

 

 

손을 놓친 엄마의 피를 토하는
‘순이야!’

 

팔십 년
그 누구에게도
위안 받지
못한


     —김영주 〈위안부(芙)〉(《나래시조》 2012년 겨울호)

 

   

김영주

각주에서 밝힌 것처럼, 식민지 시대 침략군은 어린 딸을 빼앗아 갔고 순이는 그로부터 80년 동안 그 어디에서도 위안받지 못했다. 위안부의 부 자를 연꽃 芙로 하여 이 작품은, 그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사셨을 20만 위안부 할머니들께 올리는 헌시가 되었다. 〈위안부(芙)〉는 4연 10행의 개성적인 시적 형식이다. 초장 행말의 접속조사 “와”를 단독행 단독연으로 구성한 점이 멋스럽다. 비극이 시작되는 “엄마!”라는 단말마와 “순이야!” 부르는 모성의 절규에서 소름이 돋는다. 이 비극은 진행형이다. 20만 순이는 누구에게도 위안받지 못한 채 사위어가고 있다. “와”를 포함하여 초장과 중장에서 율격행이 작품시행으로 나뉘는 지점은 발화의 강조점이다. “와”는 접속부사이기에 단말마와 절규를 이어주면서, 독립연 독립행으로 하여 이 사건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장에서는 셋째 음보까지 음보단위로 행을 배열하고 말음보는 어절 단위로 분할하였다.

 

율독과는 무관하지만, 이런 행 배열은 낭독에서는 의상(意象)의 지연효과를 유도하면서 여운을 준다는 점에서 시조의 맛과 멋을 지닌 시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두고도 시단에서는 ‘시조를 현대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작업이 오히려 형태적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다’며 시조가 아니라 “시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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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등이 있고, 시조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과 시조감상에세이 《하늘의소리, 땅의소리―백팔번뇌》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성균관대 강사, 유심시조콘서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