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의 여시아독如是我讀 ⑥-임채성, 변현상, 김영주
박기섭의 여시아독如是我讀 ⑥-임채성, 변현상, 김영주
초보운전 외 2편
임 채 성
“밥해 놓고 나왔어요!”
초보운전 경구를 보며
떠나간 옛사랑을 불현듯 떠올린다
지금은 그도 저 같은 스티커를 뗐을까
가다서다 덜컹대는
체증 걸린 길 위에서
초보 아닌 첫사랑이 세상 어디 있겠냐며
목청 큰 라디오에선 시장기를 부추긴다
무사고 이십여 년
내 사랑의 조수석엔
가마솥 누룽지 같은 여자가 앉아 있다
한소끔 뜸을 들이면 눌어도 눋지 않는,
옆 살필 짬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다
가정법원 앞길에서 속 끓이는 차량행렬
교차로 붉은 신호가 점멸등을 켜고 있다
달의 여신
보름 때면 몸을 푸네,
다랑쉬오름 그 여자
바람에 거세된 숲 안개가 스멀대면
흑주단 치마를 걷고 알 하나 둥실 낳네
흥건하게 젖어드는
깊고 푸른 밤의 숨소리
둥글게 하늘을 인 대지의 신전 위로
억새는 가을을 별러 또 씨방을 부풀리네
비너스를 잉태하던 조가비 입술 같은
심연의 굼부리에 출렁이는 달빛 양수
나, 문득
그녀의 방에
뛰어들고 싶어지네
겨울, 다원(茶園)
밤 도운 높바람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얼붙은 잔설 아래 발가벗고 누운 들녘
개망초 마른 대궁이 놀빛에 흔들린다
먼 벗의 안부 같은,
옛사랑의 손길 같은
희미한 볕뉘 위로 번져가는 푸른 이내
찻물 든 엷은 하늘이 땅거미를 지우고
골 깊은 이랑 사이 나도 따라 나무로 서면
산비알 서덜밭에 일어서는 풀빛 너울
언 가슴 빗장을 풀듯 발바닥이 뜨겁다
임채성
200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7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시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천리향 외 2편
변 현 상
그러니까 돈 갚으라 말 한 적 없었는데
저녁을 잘 드시곤 말씀도 없이 덜컥 쓰러졌댔지 결국은 애통하게도 아이 아빠는 그렇게 돌아가셨고 엄마도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그러고 보니 참 오래전 이야긴데 그때는 고마웠다고
천 리를 찾아온 거네
숙녀 되어 온 거네
마차진리에서
해안을 들이박는 저 무쌍한 파도 파도
60여 년 두드려도 갯바위로 앉아 있는
꽉 막힌 불통을 향한 통쾌한 몸짓이니
연탄불을 연탄불이 재 되어도 놓지 않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보다 간절하면
무작정 저리 달려와 장렬해도 되는 건데
으깨진 물보라가 한 경치를 펼쳐 보이는
아우성치는 이 영상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덧없는 하루살이 떼 윙윙 왕왕 흩날리는
3월의 라마단(Ramadan)
코란 대신 피켓 펼친 이슬람 신전이다
-사장님 배가 고파요 밀린 월급 좀 주세요!-
이방인
근로자 다섯
공장 앞에 엎드렸다
변현상
경남 거창 출생, 2009년 국제신문,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받음
실종 외 2편
김영주
행거에 걸쳐 놓은 물빛 스카프에
난데없는 검은 실밥 도르르 말려있다
무심코 비벼 떼다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캡슐처럼 터져버린 보리알만한 무골충
손끝이 아찔하다
세면대로 달려간다
수돗물 콸콸 틀어놓고 부르르 떨고 있다
어린 목숨 지워버린 몰래 지은 죄보다도
온종일 떠나지 않는 생생한 손 끝 기억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다
어렴풋이 드러나는 어둠 속의 틈입자
온 방을 더듬었을 애 다 끊긴 저 어미
새까만 거미 한 마리
울
먹
울
먹
내려온다
안경
한 다리로는 설 수 없어 그만 생을 접습니다
나 없이 그대 없고
그대 없인 나도 없으니
두 눈과
두 다리만으로도
넘치도록 환했으니
풀잎이 하는 말씀
풀잎이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 사이 파고 들고 싶단 말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싶단 말씀
풀잎이 또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 사이 띄어주고 싶단 말씀
가까워 너무 가까워 상처 주지 말란 말씀
풀잎이 자꾸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도 풀잎처럼 손 내주고 살란 말씀
손잡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란 말씀
김영주
1959년 경기도 수원 생. 2009년 《유심》으로 등단, 2012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조집 『미안하다, 달』
-------------------------------------------------------------------------------------------------------------
박기섭의 여시아독如是我讀 〈6〉
형식을 ‘갖춘’ 시, 형식을 ‘부리는’ 시
박기섭
1
여름인가 싶었더니 가을이고, 가을 속인가 했더니 겨울의 한복판이다. 봄도 또한 그렇게 오리라. 겨울은 늘 결빙 속에서 봄의 꽃눈을 물고 있지 않던가. 생장염장의 순환 속에 우리 현대시조도 여러 번의 겨울을 맞았고, 또 그만큼의 봄을 기다렸다. 그럴 적마다 변전의 몸부림이 있었는가 하면, 갱신의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 겨울의 한복판에서 지레 봄빛을 지피고 있다. 우리 현대시조에 또 다른 봄의 꽃눈이 참으로 절실하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그 꽃눈의 대부분은 신예 시인들이 물고 있다. 내가 줄곧 그들을, 그들의 작품을 주목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한테서, 그들의 작품에서 진정한 봄의 꽃눈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단언컨대 현대시조의 또 다른 봄은 그들한테서, 그들의 작품에서 온다.
시가 시로서 존재하는 제일의 속성은 무엇인가? 율격이다. 그래서 시를 운문이라 하고, 율격이 있기에 시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시의 대종을 이루는 자유시의 경우는 어떤가? 율격에 대한 자각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탈각이나 배제까지도 서슴지 않는 분위기다. 지나친 예단이라고 할는지는 몰라도 이는 시의 본디를 포기하는 노릇과 다를 바 없다. 시조는 정형시다. 이미 주어진 선험의 형식을 따른다. 하지만 시조미학의 핵심은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라는 데 있다. 형식에 ‘맞추는’시가 아니라 형식을 ‘부리는’ 시라는 데 있다. 선험의 형식, 그 속에는 우리말이 가진 율격의 기본 속성이 충분히 잘 녹아 있다. 때문에 그것은 부리기에 따라, 혹은 부리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율격의 층위를 보여줄 수 있다. 시조 형식이 가진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정형성 속의 가변성’임에랴.
절제와 균형, 그리고 자연스러움은 정형미학의 견고성을 보여주는 핵심 요소다. 여기에 상상력과 표현력이 더해져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조가 발화한다. 표현력이 지상의 것이라면, 상상력은 천상의 것에 가깝다. 표현력의 관건은 끊임없는 절마의 노력이요, 상상력은 인간 정신의 활성의 기운이 좌우한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현실이다"고 한 사람은 파블로 피카소다. 상상하는 만큼의 세계, 그것이 곧 자신이 꿈꾸는 시의 세계가 되리라.
깊이가 넓이를 이긴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다. 많은 작품을 쓰기보다 적더라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시인은 자신이 궁구한 정서의 극대치로 평가 받는다. 그 정서의 극대치가 곧 깊이다. 깊이를 이루자면 먼저 사유의 넓이부터 확보해야 한다. 사유의 폭이 넓지 않으면 깊게 파기도 어렵고, 자칫하면 좁은 구덩이에 갇혀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자기 타협이나 아만에 빠진 사람한테서 어찌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기대하겠는가. 정형미학의 본질을 꿰뚫는 시인의 감각은 숫돌에 벼린 낫날과 같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갖은 신산을 무릅쓰고라도 대상에 밀착해 가는 다양한 모색과 시도를 포기해선 안 된다.
이번 호 여시아독은 세상의 곳곳을 기웃거리고, 눈여겨보고, 그러면서 뜨겁게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세 시인을 만난다. 그들이 보여준 시조 3장의 행간 곳곳에 겨울 햇살을 가로지르는 빨랫줄과 그 빨랫줄을 받쳐둔 바지랑대가 보인다. 산과 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속으로 들어가는 길의 들목까지 막아버린 눈. 그 눈에 젖은 마음을 널어 말리는 데 빨랫줄과 바지랑대만 한 게 있으랴. 이제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통해 확인코자 하는 것은 그 빨랫줄의 효용이요, 그 바지랑대의 변용이다. 빨랫줄에 널어 말리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바지랑대로 받쳐둔 것은 또 과연 무엇인가?
2
임채성과 변현상이 대목장의 대패질 솜씨를 떠올리게 한다면, 김영주는 침선장의 바느질 솜씨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앞쪽의 작품은 남성 이미지가 뚜렷하고, 뒤쪽의 작품은 여성다운 결곡함이 돋보인다. 임채성과 변현상의 작품에서 보듯 남성 이미지를 대표하는 덕목은 아무래도 힘의 정서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생존 현실의 시화에 주력한다. 활달하게 치닫는 문맥의 흐름이 얼핏 유사한 듯하나, 눈여겨보면 분명한 차이가 난다. 임채성이 밖의 정서를 안으로 다져 넣는다면, 변현상은 안의 정서를 밖으로 밀어내는 쪽이다. 이와는 달리 김영주의 작품은 안정된 호흡으로 매우 섬세한 감성의 언어를 보여준다. 격렬함과 살뜰함이 서로 맺히는가 하면 풀리고, 풀리는가 하면 다시 맺힌다.
먼저 임채성의 작품부터 보기로 하자. 그는 힘의 정서를 근간으로 하되, 때로 야생마처럼 폭넓은 사유의 세계를 종횡한다. 숙련된 표현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을 구체화하거나, 그 현실 너머에 잠재된 일상성의 어떤 감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묻혀 있는 우리말을 적소에 살려 쓰는 데도 적잖은 품을 들이고 있다.
“밥해 놓고 나왔어요!”
초보운전 경구를 보며
떠나간 옛사랑을 불현듯 떠올린다
지금은 그도 저 같은 스티커를 뗐을까
가다서다 덜컹대는
체증 걸린 길 위에서
초보 아닌 첫사랑이 세상 어디 있겠냐며
목청 큰 라디오에선 시장기를 부추긴다
무사고 이십여 년
내 사랑의 조수석엔
가마솥 누룽지 같은 여자가 앉아 있다
한소끔 뜸을 들이면 눌어도 눋지 않는,
옆 살필 짬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다
가정법원 앞길에서 속 끓이는 차량행렬
교차로 붉은 신호가 점멸등을 켜고 있다
- 임채성, 「초보운전」 전문
화자는 지금 "가다서다 덜컹대는/체증 걸린 길 위에" 있다. 그런 와중에 "초보운전경구"를 붙인 차를 발견한다. “밥해 놓고 나왔어요!” 아줌마 티가 물씬한 그 "스티커"를 보며 "떠나간 옛사랑을 불현듯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은 "초보 아닌 첫사랑이 세상 어디 있겠냐"는 구절에 있다. 아무래도 초보운전일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모든 것에 서툴렀던, 그래서 떠나가고 만 그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시장기"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체 중에 스쳐간 아주 잠깐의 환상일 뿐이다. 환상은 금세 깨어진다. "목청 큰 라디오" 소리 때문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화자의 옆자리 "조수석"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앉아 있다. "가마솥 누룽지 같으"면서도 "눌어도 눋지 않는," 여자. "한 소끔 뜸을 들이"는 그 무덤덤함이 "무사고 이십여 년"을 이어온 힘임에랴. "옆 살필 짬도 없이/앞만 보고 내달"려 온 결혼생활. 그럼에도 그들이 잡고가는 삶의 운전대는 늘 불안하기만 하다. 그 불안은 곧 "가정병원 앞길에서 속 끓이는" 정체로 나타난다. "붉은 신호가 점멸등을 켜고 있"는 "교차로"를 어떻게 넘어갈 텐가. 그것이 늘 문제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초보운전」 인가 하는 의문이 풀린다.
보름 때면 몸을 푸네,
다랑쉬오름 그 여자
바람에 거세된 숲 안개가 스멀대면
흑주단 치마를 걷고 알 하나 둥실 낳네
흥건하게 젖어드는
깊고 푸른 밤의 숨소리
둥글게 하늘을 인 대지의 신전 위로
억새는 가을을 별러 또 씨방을 부풀리네
비너스를 잉태하던 조가비 입술 같은
심연의 굼부리에 출렁이는 달빛 양수
나, 문득
그녀의 방에
뛰어들고 싶어지네
- 임채성, 「달의 여신」 전문
밤 도운 높바람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얼붙은 잔설 아래 발가벗고 누운 들녘
개망초 마른 대궁이 놀빛에 흔들린다
먼 벗의 안부 같은,
옛사랑의 손길 같은
희미한 볕뉘 위로 번져가는 푸른 이내
찻물 든 엷은 하늘이 땅거미를 지우고
골 깊은 이랑 사이 나도 따라 나무로 서면
산비알 서덜밭에 일어서는 풀빛 너울
언 가슴 빗장을 풀 듯 발바닥이 뜨겁다
- 임채성, 「겨울 다원茶園」 전문
「초보운전」과는 달리 두 편이 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 「달의 여신」은 제주도 "다랑쉬오름"의 어느 가을, 어느 "보름 때"를 육감의 언어로 그려낸다. 대지 위에 둥글게 부풀어오른 다랑쉬오름 자체를 달빛에 "몸을 푸"는 "여자"로 본 것이다. 자연의 몸짓이 인간의 몸짓으로 바뀌면서 시의 문맥은 연신 출렁거린다. "흑주단 치마를 걷고 알 하나 둥실 낳네", "심연의 굼부리에 출렁이는 달빛 양수"에서 보듯, 모성 이미지와 관능 이미지가 뒤섞이면서 오름의 여성성은 한껏 강조된다. 그런 가운데 "깊고 푸른 밤의 숨소리"가 "흥건하게 젖어"들고, "억새"는 가을 달빛 속에 마구 흐드러진다. 여기서 "알" 은 곧 "달"이다. 마지막 수 종장 "나, 문득/그녀의 방에/뛰어들고 싶어지네"에서 자연에 동화하는 화자의 내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오름은 이제 "둥글게 하늘을 인 대지의 신전"인 동시에, 그 신전에 몸을 푸는 달의 여신이 된 것이다.
이런 자연에 대한 동화의식은 「겨울 다원茶園」에서도 이어진다. 심연의 굼부리로 뛰어들던 마음이 여기서는 "골 깊은 이랑 사이 나도 따라 나무로"선다. 놀라운 것은 자연의 반응이다. "산비알 서덜밭에""풀빛 너울"이 일어서고, "희미한 볕뉘 위로" "푸른 이내"가 번져가는 것이다. 그 너울, 그 이내가 겨울 다원의 "엷은 하늘"에 "찻물"을 들이고, 찻물 든 그 하늘이 또 지상의 "땅거미를 지"운다. 자연스럽게 이미지의 동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동화의식은 "밤 도운 높바람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겨울 자연 앞에 선 화자가 스스로 "얼붙은 잔설 아래 발가벗고" 눕고, "개망초 마른 대궁이" 되어 "흔들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풍경에 몰입하는 순간 "언 가슴 빗장을 풀 듯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아일여란 바로 이런 지경을 말한다.
다음은 변현상의 작품이다. 변현상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고, 당대 현실의 이 일 저 일을 집적거린다. 그의 의식은 늘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그의 발걸음은 쉼 없이 세상의 길 위를 떠돈다. 그러면서 마치 접사렌즈를 들이대듯 사람살이의 여러 부면에 접근한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강한 사회성을 띤다. 인용한 세 편도 그런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해안을 들이박는 저 무쌍한 파도 파도
60여 년 두드려도 갯바위로 앉아 있는
꽉 막힌 불통을 향한 통쾌한 몸짓이니
연탄불을 연탄불이 재 되어도 놓지 않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보다 간절하면
무작정 저리 달려와 장렬해도 되는 건데
으깨진 물보라가 한 경치를 펼쳐 보이는
아우성치는 이 영상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덧없는 하루살이 떼 윙윙 왕왕 흩날리는
- 변현상, 「마차진리에서」 전문
「마차진리에서」는 제목 그대로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가 배경이다. "덧없는 하루살이 떼 윙윙 왕왕 흩날리는" 걸로 봐서 아마 여름인가 보다. 통일전망대가 있는 그곳은 그러니까 분단 현실의 상징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화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무작정 저리 달려와" "해안을 들이박는" "파도"를 보고, 그 "아우성치는" 풍경을 모아 하나의 "영상"으로 편집한다. 그렇게 편집한 영상이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인가? 분단 현실에 대한 자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60여 년 두드려도 갯바위로 앉아 있는/꽉 막힌 불통"의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운 것이다. 분단 현실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한 경치를 펼쳐 보이는" 그 풍경이 너무도 무심한 것이다. 맞붙은 "연탄불"은 "연탄불"을 "재 되어도" 놓지 않는다. 그렇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보다 간절하면" 통일은 쉬 이루어진다. 문제는 무엇이 그 간절한 소원의 불쏘시개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게 제대로 잡히질 않으니 무책임하다고 느낄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으깨진 물보라가" "펼쳐 보이는" "한 경치"를 어찌 무념히 바라만 볼 텐가. 그것이 분단 60여 년이 지난 당대의 비극이자, 그 당대를 사는 우리의 비애인 줄 모르는 바 아니거늘.
그러니까 돈 갚으라 말 한 적 없었는데
저녁을 잘 드시곤 말씀도 없이 덜컥 쓰러졌댔지 결국은 애통하게도 아이 아빠는 그렇게 돌아가셨고 엄마도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그러고 보니 참 오래 전 이야긴데 그때는 고마웠다고
천 리를 찾아온 거네
숙녀 되어 온 거네
- 변현상, 「천리향」전문
코란 대신 피켓 펼친 이슬람 신전이다
-사장님 배가 고파요 밀린 월급 좀 주세요!
이방인
근로자 다섯
공장 앞에 엎드렸다
- 변현상, 「3월의 라마단」 전문
두 편이 다 이타의 시각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상련지정이 없이는 그 애틋함을 제대로 간파하기 어렵다. 「천리향」에는 "참 오래 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천 리를 찾아온" 애틋한 사연이 흑백영화의 스틸사진처럼 겹친다. "애통하게도" "아빠는" 쓰러지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아이. 그때 그 아이가 이제 어엿한 "숙녀 되어" 찾아온 것이다. "그때는 고마웠다고". 그렇게 고마워하는 까닭은 "그러니까 돈 갚으라 말 한 적 없었"던 그 온정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로 바뀌어 아이가 자라 숙녀가 된 세월을 잊지 않고 천 리를 찾아오게 한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천리향」인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사람 사는 세상의 오래 안 잊히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변현상은 「3월의 라마단」 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보여준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을 말하며, ‘더운 달’을 뜻한다. ‘코란’이 내려진 신성한 달로 여겨 한 달 동안 낮 시간에는 단식을 행한다. 그런 라마단이 이 땅에서, 그것도 "3월"에 일어났다. "이방인/근로자 다섯"이 그들의 일터였던 "공장 앞에 엎드"린 것이다. 이슬람인들이 엎드렸으니 그곳이 곧 "이슬람 신전"일밖에는. 심상치 않은 것은 그들이 "코란 대신" 들고나선 "피켓"이다. "사장님 배가 고파요 밀린 월급 좀 주세요!" 배가 고프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노동의 결과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기에 그들은 생계를 건 단식으로 하소를 하고 나섰을 터. 이 작품은 최근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다문화사회 일각의 부끄러운 단면을 적시한다. 그러나 화자는 철저히 견자의 시각을 유지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줄 뿐, 어떤 전언도 부가하지 않는다. 암묵의 행간 속에 담긴 언외의 뜻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김영주의 작품을 읽을 차례다. 앞의 두 남성 시인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 읽으면 좋을 것이다. 치밀한 서정의 개진과 적확한 언어 감각, 그것이 김영주의 김영주다움이다. 앞으로 내공이 좀더 깊어지면 우리 시조단에 또 하나의 분명한 개성의 세계가 열릴 것으로 본다.
행거에 걸쳐 놓은 물빛 스카프에
난데없는 검은 실밥 도르르 말려있다
무심코 비벼 떼다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캡슐처럼 터져버린 보리알만 한 무골충
손끝이 아찔하다
세면대로 달려간다
수돗물 콸콸 틀어놓고 부르르 떨고 있다
어린 목숨 지워버린 몰래 지은 죄보다도
온종일 떠나지 않는 생생한 손 끝 기억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다
어렴풋이 드러나는 어둠 속의 틈입자
온 방을 더듬었을 애 다 끊긴 저 어미
새까만 거미 한 마리
울
먹
울
먹
내려온다
- 김영주, 「실종」 전문
사소한 일상의 경험 속에 내재한 충격의 정서를 보여준다. 경험을 반추하는 마음의 행로가 여간 저어스럽지 않다. 시의 문맥은 순탄해 보이지만, 마음의 흐름은 곳곳에 주저흔을 남긴다. 요약하면 이렇다.
"행거에 걸쳐놓은 물빛 스카프에" 새끼 거미가 붙어 있다. 화자는 웬 "난데없는 검은 실밥"인가 하고 그것을 "무심코 비벼" 뗀다. 그러나 그 순간, 손끝에 남는 뜻밖의 감촉. "캡슐처럼 터져버린" 그것이 "보리알만 한 무골충"임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지만 이미 한 생명이 사라진 뒤의 일이다. 엉겁결에 "세면대로 달려가"서는 "수돗물 콸콸 틀어놓고" 씻어낸다. 그러나 "온종일 떠나지 않는 생생한 손끝 기억". 화자는 그것을 "어린 목숨 지워버린 몰래 지은 죄"로 인식한다. 이 대목을 인간의 낙태 문제로 바꿔 놓으면 충격은 배가된다. 그런 죄책감이 끝내 "어둠 속의 틈입자"를 불러들인다. "온 방을 더듬"는 "새까만 거미 한 마리". 다른 아닌 어미 거미다. 「실종」된 새끼 거미를 찾아 "울/먹/울/먹" 줄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발상이 놀랍기도 하지만, 시상의 전개 또한 무척 섬세하다. 이 대목을 다시 인간의 모성으로 바꿔 읽으면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섬찍한 여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 다리로는 설 수 없어 그만 생을 접습니다
나 없이 그대 없고
그대 없인 나도 없으니
두 눈과
두 다리만으로도
넘치도록 환했으니
- 김영주, 「안경」 전문
풀잎이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사이 파고 들고 싶단 말씀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고 싶단 말씀
풀잎이 또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과 사람 사이띄어주고 싶단 말씀
가까워 너무 가까워 상처 주지 말란 말씀
풀잎이 자꾸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은
사람도 풀잎처럼 손 내주고 살란 말씀
손잡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란 말씀
- 김영주, 「풀잎이 하는 말씀」 전문
「안경」은 김영주의 독특한 시안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나 없이 그대 없고/그대 없인 나도 없"다는, 생사를 초월하는 절절한 애모의 감정이 접고 펴는 안경다리의 심상으로 변주된다. 이 작품의 요체는 "한 다리로는 설 수 없어 그만 생을 접"는다는 초장에 있다. 정작 중·종장은 초장의 의미를 따르면서, 초장의 심상을 부연하는 역할을 한다. 중·종장이 나란히 ‘-으니’로 끝나는 각운의 형태를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영혼이 만나 합일이 되면 "두 눈과/ 두 다리만으로도/넘치도록 환"한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그런 사랑의 현현을 두 눈과 두 다리를 가진 안경의 실제 모습을 통해 실감나게 제시하고 있다.
「풀잎이 하는 말씀」은 풀잎을 읽는 눈이 자못 이채롭다. 돋아나는 풀잎의 형상에서 사람살이의 여러 형상을 유추하는 것이다. 세 수가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가지면서 "풀잎이 V 요렇게 돋아나는 까닭"을 묻고,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풀잎과 풀잎 사이는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다. 소통과 화해의 덕목을 주문하는가 하면, 순리와 상생의 의미를 일깨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 사는 사회, 사람과 사람의 참다운 관계에 대한 간곡한 전언을 담아낸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파고 들고", "이어주고", "띄어주고 싶"은 것이 풀잎의 마음이고, 이는 곧 화자의 마음이다. "너무 가까워 상처 주지 말"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주고", 서로 "손잡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란 말씀". 마치 풀잎과 풀잎이 그러하듯, 풀잎과 바람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듯.
3
‘독서삼여讀書三餘’라는 말이 있다. 책 읽기에 좋은 세 가지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 해의 나머지인 겨울, 하루의 나머지인 밤, 그리고 평상시의 나머지인 비 오는 날이 그것이다. 개중에도 겨울은 여가 시간이 가장 많은 데다, 밤 또한 길다. 그만큼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다. 내친김에 책 읽기와 관련한 글귀를 두엇 옮긴다.
"어느 맑은 밤 편안히 앉아 등불을 은은히 하고 차를 끓인다.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졸졸졸 들려와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건듯 책을 읽어본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빗장 걸고 방을 치우고선 눈 앞에 가득한 책을 흥 나는 대로 꺼내서 본다. 사람들의 왕래가 뚝 끊겨 온 세상이 고즈넉하고 온 집안이 조용하다.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에 겨울이 찾아와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싸락 눈 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바람결에 흔들리고, 추위에 떠는 산새가 들판에서 우짖을 때, 방안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차 끓이고 술 익힌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소년 시절의 책 읽기는 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책 읽기는 뜰 가운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의 책 읽기는 누각 위에서 달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앞의 것은 조선 중기 상촌 신흠의 『야언野言』에, 뒤의 것은 청나라 초기 심재 장조의 『유몽영幽夢影』에 나오는 글귀다. 상촌은 삶의 세 가지 즐거움 중에서 두 가지를 책 읽기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글을 읽는 일은 이로움만 있을 뿐 해는 없다고 덧붙인다. 책 읽기를 달 구경에 비유한 장조의 글도 참 여운이 깊다. 같은 책 읽기라도 연륜에 따라 사유의 몽리면적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책 읽기’를 ‘시조 쓰기’로 바꿔 놓으면 어떨까. 삿되고 잗단 사념이 저절로 으서지고 흐너지면서, 사유의 경개 또한 사뭇 달라지지 않겠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시조는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요, 형식에 ‘맞추는’시가 아니라 형식을 ‘부리는’ 시다.
* 출처:《나래시조》201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