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송(頌)
자작송(頌)
김영주
see창간을 기념하고, <한편의 시를 위한 여행>도 할겸 해서
시상 두 번째 겨울 투어에 나섰다.
<시상여행>은 우리가 지하철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손가락을 건 첫번째 약속이기도 하다.
원래 계획은 한 달에 한 번이었지만 바쁜 일상 속에 매달은 어렵겠고
계절에 한 번쯤은 가야하지 않겠나 혼자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계획은 원대리의 자작나무숲을 돌고 <박인환 문학관>과 생가를 둘러본 후에
소양호반을 걷다가 빙어맛을 즐기기로 되어 있었지만
때마침 빙어축제 개막일이어서 무리한 일정은 살짝 거르고
자작나무숲과 문학관 위주로 돌아보고 왔다.
시인이라면 한 번쯤 걸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그 자작나무숲
시인이 아니어도 한 번쯤 걷다보면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자작나무숲
그 많은 시인과 시인 지망생들이 한번 씩 수작을 걸어보려고 다가간 자작나무숲에서
내가 건질 말씀이 과연 남아있기는 할까 싶은 의혹 반, 기대 반으로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 <백화>
설악산 국도에서 인제 종합장묘센터 쪽으로 10km쯤 가면
오른쪽으로 인제 국유림관리소가 만든 '산림 레포츠의 숲'이 있는데
임도를 따라 100m쯤 들어선 갈림길에서 오른쪽 원정도로를 타고 3km정도 더 올라가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는 장승이 서 있다.
그 아래 비탈 6ha에 약 3만 6천여그루의 자작나무 숲이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10m도 넘어보이는, 쪽 곧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인대회에 출전한 아가씨의 늘씬한 다리처럼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봄의 연두빛 이파리나 단풍 든 가을의 자작나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홀딱 벗은 누드의 몸뚱어리가 자작나무의 전부인 것으로 입력되고 만다.
흰색이 주는 우월성이랄까.
눈 내린 산, 설경 속에 백옥의 뽀얀 살을 드러내고 서 있는 자작나무가 주는 신비함이란!
보색이 아니어도 아니, 보색이 아니어서 더더욱 도드라지게 황홀한 눈덮인 겨울산의 자작.
그저 아무것도 걸치지않은 맨 몸뚱이인데도
온 산을 신비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저 자작.
그런데 그 하얀 껍데기는 걸치나마나한 실크처럼 얇고 매끄러운 허물 한 겹 뿐이어서
그 드레스를 살짝 걷어내면 나무의 속살은 또 거짓말처럼 검다.
나무의 속살이 검은 까닭은 기름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작나무를 태울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것은 그 기름기가 타느라 그렇단다.
그 매혹적인 흰 살을 자랑하는 자작나무의 속살이 실상은 검다고 하면
참 얼마나 관능을 자극하는 게 될까.
하얀 실크드레스 속에 감춰진 검은 속살의 미인.
흰 나무라고해도 놀랍고 검은 나무라고 해도 그저 놀랍다.
그 자작나무 숲속을 자작나무와 함께 걸었다.
완만한 경사의 산책길을 다리 긴 미녀군단과 함께 걷다보니
어느새 7km 의 여정은 아쉽게 끝나고 만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눈길을 자작자작 걸어 내려왔고
자작나무도 자작자작 눈 밟는 소리를 내고 우리를 따라왔던 것이다.
아항, 새순이 돋을 땐 순 돋는 소리가 자작자작,
비올 땐 빗길을 걷는 소리,
낙엽지면 낙엽 밟는 소리를 자작자작 들려줄 것이구나.
그래, 그러니 넌 이래저래 자작나무.
혼례식 청첩장에 '화촉을 밝힌다'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양가 어머님의 화촉점화가 있겠습니다"라는 말도 낯설지 않다.
'화촉'이라는 말은 '빛날 화(華)' '촛불 촉(燭)'으로 쓰기도 하지만
'화촉점화(樺燭點火)'로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화(樺)'는 자작나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자작나무로 만든 초에 불을 켠다'는 뜻인 셈이다.
또한, 나무줄기의 새하얀 껍질을 잘 벗겨서 사랑의 편지를 적어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도 있다.
우리가 애용하는 자일리톨(xylitol)이라는 껌에는
치아에 들러붙는 프라그를 없애는 물질과 천연감미료가 들어가는데
바로 자작나무에서 추출한다고 한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의 원목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고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말안장의 그림 재료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자작나무의 다재다능도 대단하지만
그 쓰임새를 찾아낸 학자들의 위업도 참 감탄할 만하다.
아름답고 출중한 외모의 여인을 오묘조모 알뜰하게 벗겨먹고 뜯어먹는 것 같아
참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도 없지 않지만
어쨋거나 이렇게 귀한 쓰임새 덕분에 식물학자들이 이 나무를
'숲속의 귀족'이니 '숲속의 여왕' 등으로 경외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작위를 주지 않는다면 그나마 후안무치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