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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조문학> 여름호 계간평

꿍이와 엄지검지 2016. 2. 8. 21:02

계간평(2011.여름호0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

김 석 철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시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시다. 시조가 중국 한시(漢詩)의 절구(絶句), 일본시의 하이쿠(俳句), 서구시의 소네트(sonnet)에 비견되는 우리 문학의 대표적 문학 양식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시조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우리의 호흡으로 정제된 고유미학의 결정인 것이다.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지 않은가. 이제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정수(精髓)로 거듭나서 당당히 국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시조를 아끼는 마음으로 생활화하여, 대중화, 세계화가 되도록 힘써 나가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본지의 계간평에서 이미「시조의 형식과 내용 문제」,「시조의 다양한 무늬와 깊이」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기에, 이번호에는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정형시로서의 시조는 마땅히 그 운율적 형식이 올바르고, 시로서의 정제미와 함축미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도 살아나게 된다. 주로 표현방법에 의해 좌우되는 이 응축(凝縮)은 상징성과 암시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며, 한편으론 사유의 깊이도 심어주고 긴장의 묘미도 살려 주는 것이다. 대부분 시어나 문맥 또는 행간 속에 작자의 의도를 숨기는 수법을 사용하므로 독자들은 보물찾기처럼 호기심으로 그 실체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는 작자의 기량과 창작기법에 따라 그 솜씨가 다르겠지만 시조창작의 요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지난 봄호 『시조문학』의 <신작특집>과 <단시조단>, <봄시조단>의 작품을 중심으로 짚어보기로 한다.

 

먼저 <신작특집>의 작품을 살펴본다.

 

횃불을 높이 든

그대는 프로메테우스

 

천상의 불을 훔쳐

살신성인 하고 있다

 

거룩한 형벌을 받고도

인류에게 봉사하는.

 

스스로 깨친 생각

자명등(自明燈)되는 날에

 

숨겨둔 마음자리

빛이 되어 밝히며

 

천리도 손금을 보듯

되비치는 거울이여.

 

- 김정희, 「외등(外燈)」 전문

 

김 시인의 작품 5편중에서 한 편을 골랐다. 이 시조는 외등(外燈)에서 고대 그리스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이 없어 고통 받고 있던 우리 인간에게 제우스신이 감추어 둔 천상의 불을 훔쳐 맨 처음 문명을 전달한 신화 속 주인공이다. 그는 앙심을 품은 제우스에 의해 결국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肝)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손상된 간이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이 첫째 수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은 빛이며 외등이요, 외등은 프로메테우스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둘째 수에서의 외등은 깨친 생각이 되어 광명의 확장이미지로 환치되고 있는데, ‘스스로 깨친 생각 / 자명등(自明燈)되는 날에 / 숨겨둔 마음자리 / 빛이 되어 밝히며 / 천리도 손금을 보듯 / 되비치는 거울이여.’라고 노래하고 있다.

표기에 있어서 시행을 자유롭게 배치한 것 같지만 현대시조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3장 6구 12음보의 틀을 지키면서 다만 구별배행으로 형식운용의 폭을 넓히고 있는 두 수의 연시조다.

 

빛바랜 설레임도 마음먹기 나름인데

첫사랑 굳은 언약은 굴뚝 심지 아니던가

세월은 삿대질하며 시샘하 듯 투정하네

 

냉가슴 티격태격 찬 바람에 등 돌릴 때

입김 불어 군불 때며 둘둘 말아 뒹구르면

미운 정 고운 정 되어 냉골 되레 따숩나니.

 

 

- 이광녕, 「군불 때기」전문

 

이 작품 역시 이 시인의 신작시조 5편중에서 뽑은 것이다. 문학은 삶의 진지한 내용을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물로 탄생시키는 묘미가 있다. 이 시조는 견고한 정형의 미를 느낄 수 있으며, 창조적 상징의 표현 수법으로 이 시인의 인생관이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사유와 통찰에서 얻은 작품이라고 본다. 그렇다. 인생사의 모든 건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굳은 언약의 첫사랑도 세월이 가면 빛이 바래기 마련인데, 세월은 삿대질하며 시샘하듯 투정하는 것이다. 서로 티격태격 등 돌릴 때 군불 때듯 따스한 마음으로 대해주면 미운 정도 고운 정이 되어 냉골을 되레 따스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온정으로 군불 때기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분명 아름다운 삶이다.

다음은 <단시조단>의 작품을 살펴보자. 봄호엔 단시조 11인선으로 총 22편의 단수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창작은 늘 새로운 발견이라고 했다. 특히 시나 시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예술품이다. 시인은 이 짧은 단수 안에 마련한 상상의 공간에서 무한한 정신적인 삶을 영유하는 것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는 겨울산은

이웃의 노인으로 백발을 흩날린다

자연도 계절 앞에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 김 준, 「겨울산」전문

 

이 작품은 시조의 묘미와 격조를 잘 살리고 있으며 인생론적 사유가 시적으로 승화된 정격단수다. 시조의 안정감을 보여주며 자연친화 사상과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는 긍정적 인생관이 배여 있는 이 작품에선, 시상을 자연스런 율격으로 이끌어가는 세련된 시적 통솔력을 확인할 수 있다. 초, 중장에서 흰눈이 흩날리는 겨울산을 이웃 노인의 백발로 환치하고 있다. 진정 자연은 친근한 이웃이요, 겨울은 사계절의 마지막 시기로서 인생의 노년이 연상되는 모티브인 것이다. 시상의 전환을 꾀한 종장에선 ‘자연도 계절 앞에서 어쩔 수가 없나 보다.’라고 하여, 인간이나 자연은 우주의 섭리를 거역할 수 없다는 여운을 느끼게 한다.

 

동구 밖 실개천에

세월 잦는 수양버들

 

긴 겨울 동면에서

여직 졸고 있는데

 

어느 새

단장을 마친

신접살이

까치집.

 

- 장지성, 「입춘」전문

 

입춘은 24절기 중의 하나로, 정월(正月)의 절기이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라 하여 ‘입춘(立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음력으로는 입춘 날짜가 대개 정월에 속하므로 ‘새해’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입춘’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화북 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우리나라에선 이 시기의 기상이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변덕스럽고 날씨도 꽤 춥다.

이 시조는 단시조로서 초, 중장은 각 2행씩으로 배행하고, 종장만은 음보별로 배행한 8행의 시조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대시조에 있어서의 배행은 운율과 시각적인 이미지의 단위, 또는 의미에 따른 구분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시조의 시상은 ‘실개천→수양버들→동면→신접살이 까치집’으로 전개된다. 우리나라에서 까치는 예로부터 우리의 민요·민속 등에 등장하는 친숙한 새이다. 우리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친근한 새 가운데 하나로서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나 깊은 산에서는 까치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까치는 주로 사람이 심어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람이 지은 곡식과 과일을 먹으며, 심지어 사람의 흉내까지 낸다고 한다. 사람을 가까이하며 학습이나 모방까지 잘 하는 지능이 높은 새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까치소리를 듣게 되면 그날은 좋은 소식이 오거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종장을 살펴보면 ‘어느 새 / 단장을 마친 / 신접살이 / 까치집.’ 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까치집’은 입춘을 맞아 아직 날씨는 풀리지 않았는데도 미리 새해의 시작 준비를 마친 부지런한 ‘시인의 집’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시나 시조는 사실을 기록한 글이 아니라 깊은 사유와 상상을 통하여 창작한 비유와 상징의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시조 나루 건너가는

띄엄띄엄 놓인 돌을

 

나그넨 등을 밟고

수도 없이 오간다만

 

나는 왜

건너질 못하고

짝사랑만 하는가.

 

- 유 선, 「징검다리 」전문

 

단수가 살아야 시조가 산다고 했다. 형식과 내용이 적절히 잘 조화된 작품으로서 시조의 짧은 형식 속에 시상을 정제(整齊)하고 함축하는 솜씨가 부럽기만 하다. 시조에 대한 간절한 애정과 그야말로 좋은 작품을 갈망하는 아쉬움이 징검다리로 나타난듯하지만 실은 점잖은 선비적 겸손이라고 생각된다. 시의 어조 또한 온화하고 차분하다. 시조는 결국 마음의 거울을 닦는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이 시조의 행과 연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 자체가 시적 효과를 위한 미적 장치이며 하나의 감각적 의미적 형태를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얼핏 쉽게 읽히는듯하지만 짚어보면 군더더기 없이 여과된 작품이다. 특히 종장에서의 설의법 표현은 독자에게 짠한 여운으로 공감을 느끼게 한다.

 

성냥을 켜본 이면

솟구친 불꽃을 알리

 

꼭 껴안고 불다보면

풀리는 강을 알리

 

맘 주린 손가락 새로

아주 맑은 빛다발.

 

- 채규판, 「눈싸움」전문

 

채 시인은 자유시로 등단하여 여러 권의 시집 외에 시조집까지도 출간한 바가 있는 원로시인이시다. 체험과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 얻은 깨달음에서 탄생된 작품이라고 본다. 현실세계를 뛰어넘는 개성적인 사유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참신함이 있다. 형이상적 관찰력과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 주어 심안(心眼)으로 직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깊고도 조용한 응시랄까. 풍류적 의식을 배제한 표현으로 그 비유와 상징이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간결한 시어의 부림 또한 돋보이는 시조라 할 것이다. ‘맘 주린 손가락 새로 / 아주 맑은 빛다발.’이라고 하여, 종장을 명사로 종결함으로써 응축과 여운의 효과도 거두고 있다.

 

밤 지새

꽃잎 빚어

 

은총이 열린 아침

면사포 쓴 가지마다

 

은빛 환희 눈부시고

 

바람은

고요를 깨워

순백의 말 던진다.

 

- 김사균, 「설화(雪花)」전문

 

김 시인의 언어는 참신하며 이미지를 미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상도 신선하고 명징하다. 비유와 상징의 수사(修辭)를 통하여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상이 ‘꽃잎→은총→면사포→순백의 말’로 전개되어 확장된 사유의 공간에서 자연스런 질서화를 꾀하고 있음도 나타나 보인다. 초장의 ‘밤 지새 / 꽃잎 빚어 / 은총이 열린 아침’에서 우리는 시적허용을 인지할 수 있으며 효과적인 표현의 기교를 맛보는 것이다.

 

한 숟갈 식은 밥도

못 버린 빈처(貧妻)처럼

 

식상(食傷)해 식어빠진

허드레 생각들을

 

누더기 기워 짓듯이

조각조각 꿰맸다.

 

- 고두석, 「오늘도 시조 한 수」전문

 

시의 3요소를 충족하며 시조의 형식적 특성을 잘 지키고 있는 정격시조다. ‘식은 밥, 빈처처럼, 식상해, 허드레, 누더기, 조각조각’ 등의 시어가 비유하고 또 암시하는 바는 자못 그 의미가 깊은 것이다. 특히 중장과 종장의 ‘식상(食傷)해 식어빠진 / 허드레 생각들을 // 누더기 기워 짓듯이 / 조각조각 꿰맸다.’ 에서는, 오늘의 시조문학이 당면한 현실의 한 부분을 짐작케 하는 것 같아 다소 착잡해지지만, 반면에 현실을 올바르게 진단함으로써 현명한 처방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오늘도 시조 한 수, 내일도 시조 한 수를 되뇌어 보며 시조에 대한 미래를 떠올려 본다.

 

똑바로 누워 자야

용꿈 돼지꿈을 꾼대

 

아니, 난 이게 좋거든

편안하고

포근하고

 

고향 꿈

자궁 생각일세 그려

꼭 그 안의

꼭 그 모양.

 

- 박종대, 「새우잠」전문

 

이 시조는 친근감이 드는 대화 형식을 빌어 좀 엉뚱한 듯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이 매혹적이며, 시적 대상을 대하는 시의 눈, 시의 마음이 그야말로 순수하고 긍정적이다. 하찮은 일상생활에서 시상을 포착하여 예리한 직관적 통찰로써 내공을 들여 다분히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발한 심상의 변주라고나 할까. 보통 사람의 인식과 통념을 뛰어 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인다. 중장과 종장만을 살펴보더라도 ‘아니, 난 이게 좋거든 / 편안하고 / 포근하고 // 고향 꿈 / 자궁 생각일세 그려 / 꼭 그 안의 / 꼭 그 모양.’, 내용 못지않게 그 기사 형식이며 시행의 배치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박 시인의 시선에 잡히는 물상은 일상적이며 우연한 것이라도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게 하며, 평범함의 비범성을 성공시키는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찢겨서 나부끼랴

바람 젖어 서러우랴

 

차라리 숨결인 것

강물에 널어 두랴

 

시샘도 은무리 져서

멈칫멈칫 흐느끼랴.

 

- 신길수, 「섬진강 저녘 놀」전문

 

자기 심화를 이룬 신 시인의 인품에서 잔잔한 여운의 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서정적 시상이 율격과 어우러져 조화미를 이루고 있다. 자연이 주는 모든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 이미 잘 갖추어져 있으니 시인은 언제든지 바라보고 감상만하면 그냥 시인의 것이 되는 것이다. 잔잔한 바람결에 물무늬 이는 섬진강 저녘 놀의 서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고 본다. ‘나부끼랴’ ‘숨결인 것’ ‘은무리 져서’ 등 순수 우리말의 시어가 참신한 맛을 더해주면서, 초, 중, 종장의 끝 음보를 ‘서러우랴’, ‘널어 두랴’, ‘흐느끼랴.’ 등으로 하여 각운의 효과도 거두고 있다. 누가 시인의 말은 걸음이 아니요 춤이라고 했던가

.

다음은 <봄시조단>의 작품을 살펴보자.

 

걷다 보면 애먼 데서 삐끗할 때가 있다

발목이 시큰대서 오늘을 사르는데

망연히 바라보는 길, 가슴이 무너진다.

 

- 김명호, 「길」전문

 

‘길’이라는 단어는 다의어(多義語)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의 ‘길’은 흔히 쓰는 ‘사람이 통행하는 길, 오가는 길’을 지칭하지만, 시어로서는 다분히 상징성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시어는 대부분 상징적, 함축적, 암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오가는 길〔道〕’의 뜻으로 쓰였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도중(途中)’의 의미도 함유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평상시 잘 다니던 길에서도 우연찮게 삐끗하여 발목을 다치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불상사라도 겪게 되면 누구든 망연자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표기형식을 보면 각 장마다 행간 간격을 두어 간절한 뜻을 숨겨둠으로써 독자들에게 보다 깊은 사유를 유도하면서 그 공감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종장의 끝구 ‘가슴이 무너진다.’ 에서는 비유법과 과장법의 복합적심상으로 표현의 효과를 거두고 있음도 발견할 수가 있다. 시조는 기본적으로 율문미학이 아니겠는가. 이 짧은 3장의 작품 속에 우리의 삶이 들어 있고 세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눈부신 가을햇살

천지가 밝은 대낮

 

해보다 붉은 화염

연평도를 덮어버려

 

왕세자

억지 책봉에

포탄선물 퍼붓는가.

 

- 이수용, 「연평도 교전」전문

 

지난 해 11월에 일어난 연평도 도발은 휴전 이후 처음 일어난 북한의 직접적인 포격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군인과 민간인들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군부대시설과 주민의 민간가옥 여러 채가 파괴되거나 소실되는 피해도 입었었다. 이제는 사건이 발발한지 5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한반도에 전쟁의 공포를 일깨워준 전대미문의 북한의 포격사건이었다. 현실 상황을 시적 이미지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다. 현실적 상황과 내면적 의식이 함유돼 있고,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박성이 나타나 있다. 쉽게 읽혀지는 것 같지만 행간에는 절절한 원망과 아픔이 깃들어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런 현실적 안목과 비판의식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시인의 의식인 것이다

.

때 없이 서는 날(刀)에 가슴을 베인다

내가 나를 보이는 일이 왜 이리 힘든 걸까

삶이란 리허설 없는 서툴기만한 연극무대

 

한 가닥 풀고 나면 또 한 가닥 맺어진다

가쁘게 골라온 길 크게 한숨 돌리던 날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만 했었다

 

다 주려 하지말자

다 알려고도 하지말자

너무 많은 굴레를 스스로 만들고 산다

이제는 짐 벗고 싶다

훌훌 벗어 던지고 싶다

 

이렇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무대 밖 객석에 앉은 관객이고 싶은데

앞마당 야윈 가지에

봄, 너 온 줄도 몰랐다.

 

- 김영주, 「쓸쓸한 날의 모노드라마」전문

 

김 시인은 시조의 전통적 형식과 내용에서 창조적 계승을 꾀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조의 일반적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엇비슷한 시조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참신한 시상을 재치 있게 포착한 자기성찰의 시조다. 시상을 네 수 연시조로 이끌어간 그 호흡과 기량이 돋보인다. 어쩌면 현실에 대한 개성적 접근이라고 할까. 인습적 타성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시인은 항상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해석을 하는 예술인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존의 생각과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시적 대상을 새롭게 보는 탈관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러하겠지만 문학, 특히 시조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려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다.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없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상으로 계간『시조문학』의 지난 봄호에 발표된 작품을 중심으로 ‘시상의 응축과 여운의 미’를 살펴보았지만, 주마간산 격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본지에 실리는 시조들은 다른 시조전문지나 문예지에 비해선 시조의 기본틀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이라면, 아직도 형식에 끌려가며 율격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와, 평이한 내용을 행만 바꾸어 시조처럼 조립한 경우, 소재나 주제를 비롯해서 그 내용이나 표현이 새롭지 못한 경우 등이 있다는 점이다. 이 모두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다음에는 모쪼록 시조다운 맛과 멋을 주는 시조, 개성이 뚜렷한 시조, 시혼이 깃든 참신한 시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맺는다.

출처 : 월하시조문학회
글쓴이 : 김명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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