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가지고 놀다 五讀悟讀-정희경 / 시조21 특집
언어를 가지고 놀다
정희경
시인을 가리켜 흔히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한다. 그만큼 시인은 언어를 잘 부릴 줄 안다는 말이지만 그 말에는 시인의 언어에 대한 책임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시인은 사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도구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언어는 살아 있어야하고 늘 새로움을 추구해야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녀야 한다.
입말, 사투리, 속담, 때로는 비속어까지 사용하여 시조의 맛을 제대로 살린 작품을 우리는 많이 만난다. 그런 시조들은 시조의 확장을 꾀하고 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충분하다. 문무학 시인은 <낱말 새로 읽기>를 통해 ‘낱말의 순수한 표상 밑에 인간학을 응고시켜 단순한 말놀이적 성격을 훨씬 초과’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시인들은 언어가 가진 고유의 의미 외에도 의미를 무한대로 확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이 가진 특성, 특히 동음이의어와 다의어의 특성을 잘 살려 시조의 맛깔스러움을 돋보인 다섯 작품을 통해 언어의 내재적 의미 확장과 언어 속에 숨겨둔 시인의 또 다른 말을 들어본다.
웅웅 울며 돌고 또 돌아
그 속을 다 뒤진다
뒷주머니 얌전하게
접혀진 만 원 한 장
콕 집어
햇살에 말린다
꿈에도 없던 돈 세탁
-조명선 「세탁」 전문, 『하얀 몸살』 2011 동학사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직한 일이다. 잘 접혀서 깨끗하게 세탁되어 나온 만 원짜리를 보면 횡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해 한두 번 입다 넣어둔 옷에서 만 원짜리를 발견한다고 해도 잊고 지낸 그 만원이 참으로 뜻밖이고 반가운데, 그것이 남편 혹은 아내의 바지 주머니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시인은 ‘돈 세탁’이라는 시어를 가지고 와서 위트와 해학을 곁들여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웅웅 울며 돌고 또 돌아/ 그 속을 다 뒤’져도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만 원이 ‘뒷주머니’에 ‘얌전하게’ ‘돈 세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웅웅’ 우는 것은 세탁기의 모습이지만 ‘돈 세탁’에 희생 되는 서민들의 모습과 겹친다. 그들이 울든 말든 만 원은 요동도 않고 얌전히 그것도 앞주머니가 아니라 ‘뒷주머니’에 있는 것이다. 축축하게 젖은 만 원을 시인은 ‘햇살에 말린다.’ 세탁을 한 돈이 음지인 ‘뒷주머니’에서 나와 버젓이 양지로 진출한 것이다. 때 묻은 돈이 세탁을 했으니 깨끗해졌으리라. 시인은 ‘울음, 뒤, 햇살’ 이란 시어를 적절한 위치에 배열하여 그 시어들이 가진 중의성을 십분 발휘 ‘돈 세탁’이라는 잘 짜인 구조를 완성했다. 평범한 시어를 재치 있게 부린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땀 흘리는 사람들이 대접받게 하겠다고
김 후보가 말하자, 정 후보가 받아쳤다
“대접만 받으면 뭐해, 먹을 걸 담아줘야지!”
-박방희 「시옷 씨 이야기 3-대접」 전문, 『너무 큰 의자』 2012 초록숲
동음이의어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되는 공약에 통쾌하게 일격을 가해서 읽는 독자는 시원하다. 그런데 독자는 여운이 남는다. 먹을 것을 담아 준다고 과연 좋은 후보일까? 먹는 것이 최우선이기는 하지만 21세기는 먹는 것에서 한층 더 나아가 복지를 추구한다. 결국 경제적인 배부름에 더해 정신적인 욕구도 충족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 후보’나 ‘정 후보’나 마찬가지이다. 시조를 끝맺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독자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꺼리를 제공하고 있어 놀랍다. 분명 독자들은 빈 대접이 아니라 먹을 것을 가득 담은 대접으로 대접받기를 원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제목에 시선이 먼저 간다. 왜 ‘시옷 씨’일까? 작가는 ‘생각하는 사람’의 첫 글자 ‘ㅅ’의 한글 자모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많은 상상을 일으키는 제목이다. 시옷(ㅅ)은 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다. ‘이빨이 세다’라는 관용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ㅅ’은 한자 ‘사람 인(人)’자와 모습이 가장 닮은 자모이다. 여기에서 유추한다면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ㅅ’은 훈몽자회에서 ‘시옷’(時衣: ‘옷’은 의(衣)의 뜻을 읽은 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읏’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한자에 ‘읏’ 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대의 소리’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또한 ‘시옷’은 ‘시(詩)의 옷’으로 혹은 ‘시인(詩人)의 옷’으로도 읽히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 본다. 어쨌든 시옷은 한글 자음 중에 중간에 위치하며 가장 매력적인 자음이다. 중간에 위치 한다는 것 또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형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작품을 읽는 맛이 더 살아날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있지만 더 많은 것을 독자는 상상할 수 있으리라.
동음이의어나 다의어는 사회를 풍자하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감동을 행간 속에 펼친 두 편의 시조를 만난다.
변두리 허름한 이층건물 위아래층에
거룩한 主'사랑교회'
酒맛 좋은 '풀잎사랑'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삶을 이야기한다
흙바람 속 빗물과 투명한 눈물 사이
첨탑 위 십자가와 진분홍 간판 사이
어둠이 밀려오면 눈뜨는
네온사인 두 사랑
-김선화 「공존」 전문, 《시조춘추》 2012 하반기호
제목에서 이미 이 시의 주제를 말하고 있어 편안하다. 그 편안함은 첫 수에서 공존의 단초가 되는 음이 같은 한자어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연장된다. 그리고 끝까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물을 대비시켜 결국 합일점을 찾고 있다.
‘흙바람 속 빗물’과 ‘투명한 눈물’, ‘첨탑 위 십자가’와 ‘진분홍 간판’ 의 선명한 대비는 이 작품의 백미이다. ‘흙바람 속 빗물’은 건물의 외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사랑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혹은 ‘풀잎사랑’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씻는 ‘투명한 눈물’이 되는 것이다. ‘위아래층’이라는 같은 건물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시각적 공간만을 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도 함께 쓰고 있다. ‘흙바람 속 빗물’이 ‘진분홍 간판’과 ‘투명한 눈물’이 ‘첨탑 위 십자가’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인은 순서를 초장에는 ‘흙바람 속 빗물’을 먼저 배열하고 중장에는 ‘첨탑 위 십자가’를 먼저 배열함으로써 이들의 공존을 꾀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만큼 십자가가 밤에 많이 빛나는 나라가 드물다고 한다. 그런 십자가들이 더 낮은 눈물과 소통하고 어울려 공존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네온사인 두 사랑’만큼 따뜻하다.
홈쇼핑에 주문한 간고등어 두 마리
손이 손을 감싸 쥐어 한 손이 된 것처럼
두 몸이 서로 포개져 한 몸으로 배달됐다
손이 손을 받아들여 한 손이 됐다는 건
신 앞에 섰다는 말
기도하고 싶다는 말
눈물이
쏟아질까봐
눈 못 감고
염拈
화 華
미 微
소笑
-김영주 「'한 손'이라는 말」 전문, 《서정과현실》 2013 하반기호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동음이의어와 다의어라고 한다. ‘손’이라는 단어는 많은 동음이의어와 다의어를 가진,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이다. ‘한 손’의 ‘손’은 물건을 한 차례, 한 손으로 집을 수 있는 분량을 나타내는 의존명사이다. 그러므로 ‘한 손’은 물론 ‘손(手)’과 관련이 있는 단어이다. ‘간고등어’ 한 손의 모양을 마치 ‘손이 손을 감싸 쥐어’ 기도하는 모습으로 읽은 시인의 예리한 통찰력이 빛난다. 큰 몸이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에서 시인은 ‘서로 포개져 한 몸’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결국 ‘한 손’이라는 것은 ‘한 몸’이 되어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눈물이/쏟아질까봐/눈 못 감고’ 있는 ‘간고등어’의 모습을 ‘염화미소’로 표현했다. ‘눈물’은 또 다른 기도의 모습이며 ‘염화미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한 손’이 ‘한 몸’이니 당연한 귀결이다. ‘간고등어’의 모습에서 ‘염화미소’를 이끌어 내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손’이라는 시어가 그 중간에 매개체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시인은 ‘염화미소’를 마치 물고기 모양으로 행을 배열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노련함도 보인다.
익살과 풍자, 역설, 해학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 사설시조이다. 그래서 사설시조에는 우리말이 능청거린다.
아내는 나더러 쇠처럼 살라는데
그 쇠가 무슨 쇠냐 타령조로 읊어보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돌쇠에다 땀흘려 일할 때는 억척스런 마당쇠, 닫힌 마음 철컥 여는 만능열쇠로 살다가 제 입 꽉 다문 자물쇠로 또 살라네. 모진 풍파 끄떡없이 무쇠처럼 겪어내고 자본주의 경쟁시대 구두쇠로 견뎌내도 둥글둥글 굴렁쇠에 밤에는 변강쇠, 이 쇠 저 쇠 좋다며 닦달하는 요즘 세상
나는야 쇠귀에 경 읽기 어화둥둥 모르쇠
-손증호 「쇠처럼 살라는데」 전문, 《시조시학》 2013 가을호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시조는 음악이 사라지고 읽히는 문학으로 남았지만 정형률을 갖춘 문학이다. 이 시조를 읽으면서 자연히 리듬을 타게 되는 것은 시조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맛이다.
우리말을 부리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아내의 ‘쇠처럼 살라’는 요구를 빌어 현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자칫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타령조로 풀어 해학적이다. ‘돌쇠, 마당쇠, 구두쇠, 변강쇠’인 사람에서 ‘만능열쇠, 자물쇠, 무쇠, 굴렁쇠’ 인 사물에까지 그 비유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흥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 시대 슬픈 가장들의 모습이 깔려 있어 가슴 아프다. 반복과 열거, 해학과 풍자를 적절히 이용하여 사설을 잘 풀었고 우리말의 특성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에 시인이 의도한 의미 확장에 성공한 것이다.
이 사설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이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어 구조가 탄탄한 작품이다. 각 장은 독립적 의미기능을 유지하면서 주제를 향한 유기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종장에서의 반전은 시적 전환과 결말의 맛을 잘 살려 시조의 미학적 특성이 잘 나타난다. 시조가 아름다운 3장의 문학임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낀다.
‘시는 번갯불의 섬광이어서 어휘들의 배열로만 끝날 때는 단순한 작문에 불과하다.’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어는, 영혼을 담은 시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음이의어나 다의어를 사용한 작품이 심오한 은유나 상징, 현란한 수사, 명징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말이 가진 특성을 잘 살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때문에 주제가 명확하다. 또한 그 단어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다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시조로 담을 수 없는 주제가 없듯이 시어로 사용할 수 없는 단어는 없다. 입말, 사투리, 속담, 비속어는 물론이고 우리말의 특성을 잘 살린 시어들이 시조의 영역을 더 확장하고 더 많은 독자확보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약력; 대구 출생.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 제4회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수상. 영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