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중 시인의 시집 <<물의 혀>> - 문학의 전당
걸어둘 것이 있는 방
나석중
텅텅 망치 맞는
못대가리 얼마나 아플까
쿵쿵 못 끝 받으며 생살 찢는
벽은 또 얼마나 아프고
佳約이란
서로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무엇보다 아픔을 견디는 것인가
백 년의 시간을 단단히 응고시키는
묘약인가
아 그러나 속내는 녹슬며
마르며 삐거덕거리며 짜릿한
환상통도 있는 그 방
걸어둘 것이 있는 방
독毒
나석중
독 중에도 맹독은 고독이라는 독
사랑도 물건도 그 어떤 것도 방치하면 안 된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 신고 황당한 일을 보고 말았다. 상자에
넣어둔 채로 오랫동안 아껴온 멀쩡한 새 신발 꺼내 신고 외국여행
가려는 길에 뒷굽이며 밑창까지 마른 개흙처럼 부슬부슬 떨어지는
게 아닌가!
상자 속에서 맑은 햇빛 보지 못하고 그간 저 혼자 속 푹푹 삭고
있었던 것, 마침내 이때다 하고 너 당해봐라! 제 몸 산산이 자해하여
낭패를 보이는
참 멍청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아끼는 것이 아니었다
풍경
나석중
추녀에
달아준 풍경이 잠잠하다
한쪽으로 자꾸 기울어지는 이 집 한 채
저 작은 저울추 하나로 평정을 누리고 있다
한 바람 불어주어야
비로소 꺼내는 허공 소리
추녀에 맑은 목소리가 없다면
이따금 목소리조차 내지 않는다면
이 집의 고요는 너무 쓸쓸할 것이다
목에 걸어 고단한 황소의 졸음마저 깨우는
한 남자의 황폐해져 가는
추녀에
방생
나석중
남한강 돌밭에서
콩 꺼풀 같은 눈으로
저만치 숨죽여 보는 거북이 한 마리
아, 거북이는 돌이 아니고
허울만 남은 하얀 배때기에
壽福康寧이라는 먹 글씨 선명하다
두 눈깔은 물새에게 보시했는지
휑뎅그렁한 눈 확에 으슬으슬 강바람 돌고
鄕愁도 육질도 버린
딱딱한 박제만 남았다
인제 그만 난민도 아닌 무죄한 백성들
잡고 놓아주는 일이 오히려
죄 같고
서글프다
의자
나석중
당신은
이런 의자를 생각한 적 있나
삐거덕거리는 내 관절을 싹 고쳐서
내가 내 애인의 기쁜 의자가 되는 일
내 애인의 보드라운 쿠션이 내 몸에
지긋이 와 닿아 하늘 땅 숨통 열리는 일을
세상에 그만큼 따스하고
행복한 무게를 느껴 본 적 있나 당신
밤새도록 걱정 많은 비는 내리고
잠은 켜졌다 꺼졌다 고장 난 가로등
한밤중에 일어나 이런 시를 쓰는 일은
하나님께 송구하기도 하지만
내가 내 애인의 의자가 되겠다는데
아니꼽다는 말인가 당신
나석중 시집 <<물의 혀>> 2012 문학의 전당
2017년, 1월 몹시도 추운 날. 갑작스레 뚝 떨어진 기온에 몸을 사리던 날,
서울의 한 밥집에서 <디카시>를 인연으로 만난 우리 몇몇은 모여 저녁을 먹었다.
나석중 선생님의 시집을 연 전에 한 권 받은 적이 있고,
또 선생님의 시를 익히 알기에 주시는 시집이 명절날 세배돈처럼 반가웠다.
올해 몇 세라고 내가 선생님의 연세를 거론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선생님의 시에서는 나이를 들키지 않는다.
누가 읽으나 마음을 다독거리기에 충분한 선생님의 시.
거친 풍상을 잘 감싼 시인의 둥글어진 모서리로 어렴풋이 적잖은 연화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애인을 노래해도 유행에 따르지도, 감정에 왈칵 엎어지지도 않는, 외설스럽지는 더더욱 않는.
노후에 야생화와 수석을 벗삼아 다리품 아끼지 않고
그 덕분에 건강도 챙기시는 선생님의 시를 오늘 아침에 꺼내 읽는다.
상처를 잘 승화시키는 선생님의 시를 시작으로
내게도 <걸어둘 것이 있는 방>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동안 소홀했던 시집 읽기를 짬짬이 하려고 한다.
'시詩'를 만나고부터 뭘해도 허전한 가슴,
뭘해도 답이 없는
그 숱한 하루 중의 하루를 시작하면서.
- 김영주
2017.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