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이와 엄지검지 2018. 12. 19. 11:13

 

2011년 열린시학 겨울호 시조 계간평 

 

그리움, 맵거나, 쓰거나 혹은 흐리거나

 

박지현 

 

시작이 절반이라 하지만 한 해를 보내는 지점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시작’이라는 테잎을 끊자마자 시작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을. 하지만 시작은 늘 새롭다. 끝의 반환점을 돌아 시작은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사실 순환의 운명적 고리는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분간하기도 매우 어렵다. 중간 중간 번호를 붙여도 그 번호 마저 순환이라 종당엔 시작과 끝의 지점이 서로 합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늘 가슴 벅찬 일이다. 어차피 반복일지라도 시작이라는 푯말은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끝은 늘 가슴이 아리다. 그러니까 시작과 끝이라는 법칙 아래 우리의 가슴은 자주 벅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 이면엔 지나간 시간을 향한 아쉬움에 소멸과 상실에 나를 맡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해를 보내면서 새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삶을 유지하려는 동기와 삶을 창조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두 동기야말로 사람을 보다 넓은 방향으로 작동하게 한다. 수면, 식욕, 배설 등은 필수적 욕구들로 인간의 삶에 가장 필수적인 1차적 욕구라면, 자기를 완성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욕구는 2차적 동기가 된다. 2차적인 동기 즉 고차원적인 동기는 곧 메타 동기화(meta-motivation)된 삶을 일컫는다고 하는데 자칫 실현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욕구 불만이나 불안과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 메타 병리(meta pathology)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입장은 일반인과는 분명 선을 긋게 된다. 병리적 현상에 자신을 쉽게 내맡기지 않는다. 빠르게 덮여오는 시간의 조임에 그 불안적 요소를 오히려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펼쳐드는 것이다. 아래의 시인들의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리움’, ‘애증’의 경우, 결핍과 상실을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전환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해송, 전연희, 강문신, 정경화, 김경태, 김영주(아래글 전문)는 각기 처한 메타 병리적 현상에 온몸을 내맡기는 듯 하면서 그 속의 새로운 욕구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나씩 살펴본다.

 

아버지 양복 주머니엔

늘, 명랑이 들어있었다

 

늦둥이 내 호기심도

명랑만 보면 명랑해졌다

 

혹시나 명랑 덕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명!

랑!

하셨다

 

지금은 약국에서 명랑을 팔지 않는데

아버지 명랑 없이도 그곳에서 명랑하실까

 

약국 앞 지날 때마다

궁금하다

명랑

—김영주 「명랑明朗」전문 (『열린시학』2011. 가을호)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이 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두통약 ‘명랑’을 통해 발현시키고 있다.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시대는‘명랑’뿐만 아니라, ‘뇌신’, ‘노신’ 등의 약도 이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개인적 기호와 두통의 정도에 따라 셋 중 어느 하나를 선호했다고 할 수 있다. 늘 아버지 곁에 호신용 무기처럼 두통을 잠시 잠깐 멈추게 할 ‘명랑’은 어린 시인의 눈에 신기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게 뭐길래 아버지를 한 순간 두통에서 해방시킬까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호기심 어린 어린 시인이 명랑을 삼킨 아버지와 덩달아 ‘명랑’할 수 있었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때의 호기심은 단순하지 않다. 아버지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화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현실에 나의 현실이 이입되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 따숩고 밝았던 한 때가 ‘명랑’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뭔지 모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무거운 현실은 매일 두통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주변적 상황과 신체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는/명!/랑!/하셨다’를 강조함으로써 그 문제의 일시적 해결점이 명랑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러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암시를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한 편의 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성의 폭은 사실 그다지 넓지도 크지도 깊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곳곳에 편재한 시어나, 시어의 압축적 의미와 행간의 여백에 따라 연속적 의미와 맛을 길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시의 경우는 넷째 수의 ‘아버지는 명랑하셨다’에서 특히 ‘명!’, ‘랑!’에 느낌표를 각각 달아 새삼 강조함으로써 반어적 느낌을 강하게 불러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이라는 말과 흡사한 느낌의 굳이 그 이면을 들출 것 없다는, 비극적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깔아놓은 셈이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명랑도 더 이상 팔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은 늘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재생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곳’에 계신 명랑 없이 지내실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 궁금증은 다시 그리움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그 때가 밥을 할 때이거나, 먹을 때이거나, 집안 일을 하거나, 회사 일에 열중할 때이거나, 달리거나, 걷거나 기차를 타거나 골목길을 걷거나 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득문득 아무 때나 들이대는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유용한 자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꼭 필요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 두 동기가 다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야만 확장되고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장치를 타고 전달되는 감정의 극한점인‘그리움’과 ‘오욕칠정’ 만큼은 기억과 꼭 붙어 다니는 것이어서 인간에게 도무지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활력소이자 에너지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완성된 시를 앞에 놓고 한층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1996년《시와시학》(시),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으로 《저물 무렵의 詩》외 4권과 논문 「일제강점기 저항시의 주체 연구」등이 있다.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8년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0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아주대, 호서대 강사. hlm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