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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 단상

꿍이와 엄지검지 2012. 3. 25. 09:03

 

 

디카시 단상

 

김영주 

 

나는 디카시를 처음 접하고 어쩜 이런 매력적인 작업이 다 있었나 하고

단번에 빠져버린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사물을 읽어 내는 방법이나 능력은 개인의 취향이나 기타 여건에 따라 달라

같은 대상을 보고도 서로 판이한 감동을 갖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디카시 역시 남이 읽어내지 못한 나만의 감동을

사물 혹은 현상에서 포착해내고 그것을 디카로 담아 그 즉시 느꼈던 감동을 표현해낸다.

 

기존의 포토포엠과 구분을 한다면

포토포엠은 시를 창작해놓고 그 시에 어울리는 사진을 구성하던가 아니면

사진을 찍어놓고 그 사진에 어울리는 시를 쓰는 형식이라면

디카시는 시적 영상을 (극)순간 포착하여 바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창작자 개념보다는

포착자 개념이 우세하다고 한다.

 

여기서 디카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날시'라고 하는데

디카로 포착한 날시는 침묵하는 언어로

시인이 그 침묵의 언어를 듣고 옮겨 놓는 작업이 바로 디카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의 시를 다양한 매체, 그러니까 음악이나 영화, 무용, 만화 등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일종의 종합적인 소통 방식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시를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매체의 전달 방식을 벗어났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많은 오해 중 하나는 디카시의 구성 요소인 사진과 문자(시)를

단순하게 각각 사진이나 일반 문자시와 비교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디카시의 사진과 문자는 둘이 결합되어 하나의 텍스트가 될 때에만 존재의미를 지닌다. 

 

만약 이 둘을 따로 떼어서 각각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일반 사진예술과 디카시의 사진을 단순 비교하거나

일반 문자시와 디카시의 문자시를 단순 비교하면

디카시의 사진이나 문자시는 경쟁력이 전혀 없다.

사진도 아니고 시도 아닌 것이 된다. 

 

기존의 시가 문자언어를 매개로 하는데 비해

디카시는 문자와 사진을 동등한 매개체로 인정하는

디지털 시대 멀티 언어예술 장르를 표방하므로 시 따로, 사진 따로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시와 문자가 합쳐져 하나의 의미전달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디카시를 기존의 시의 미학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되고

가령, 시의 갈래가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등이 있다면,

디카시도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시 형태 중하나일 뿐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우리시만 하더라도 개화기 이전에는 자유시나 산문시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시대정신을 정형시 이외의 형식으로도 담기 위하여

자유시나 산문시가 나타났듯이

디카시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서 등장한다.

 

디카시가 가지는 특징으로 

극서정성, 극현장성, 극순간성, 극사실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디카시의 '날시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디카로 포착하는 이미지 사진은 예술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디카시가 좋아서 쓰기는 하지만 쓸수록 어려움을 느낀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디카시이기는 한 것인지도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또한, 나처럼 거부감없이 그대로 디카시를 수용하는 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인터넷으로 편지를 쓰고 있지만

그 메일을 아무도 편지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디카를 넘어 폰카시대를 살고 있다. 

디카시가 새로운 문학의 갈래로 일어서고(2004년 창신대 이상옥 교수)

지금도 연구진들에 의해 꾸준한 담론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