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 김영주 마중물 김영주 내 피는 야성의 피 고요하나 뜨거운 저 거친 돌풍에도 근성을 잃지 않는 꺼질 듯 꺼질 수 없는 한限 같은 혼입니다 주체 못 할 이 열정 당신에게 바칩니다 창백한 그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면 멈췄던 심장을 깨워 펌프질을 합니다 목마른 당신에게 내 전부를 쏟아붓고 갈증이 해소되면 간단히 잊혀지는 당신을 마중하는 일 . . . 스러지는 일입니다 2022년 5-6월호 ♡♡/발표연시조 2022.05.15
쉴낙원 / 김영주 쉴낙원 김영주 출근길엔 안 보이고 퇴근길에 보이는 가로수에 반쯤 가려 여차하면 숨어버리는 갓길로 천천히 가야 희뜩번뜩 보이는 이름 한번 고즈넉해서 볼 때마다 피식 웃는 모텔 집 간판 치곤 그런대로 점잖은 무심코 지나갈 때는 잊었다가 아, 하는 저 작명 누가 했을까 궁금증 동하다가 어느 날 에그머니나, 깜짝 놀라 다시 보니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영면을 빌겠다'는 쉴낙원 쉴이란 게 그 쉴이 아니었다 쉴낙원 그 깊이를 내 함부로 웃다니 쉴낙원 그 망망함을 눈물 없이 읽다니 그대여, 이 가벼움 마음에 두지 마소 그리라도 웃었음은 님을 위한 헌사요 당신도 웃으며 가소 가볍게 가볍게 가소 <시조21> 2021 가을호 - 50인50색 ♡♡/발표연시조 2021.10.21
좁은 방 이야기 / 김영주 좁은 방 이야기 - 1979년 김영주 엎드려 책을 보다 "엄마 커피?" 묻는다 문안장*이나 가야 사는 미제 맥심 커피에 설탕을 달게 떠 넣고 크림도 듬뿍 푼다 두 개의 머그컵을 한 손에 움켜잡고 내 커피 엄마 커피 맨바닥에 내려놓자 "쯧쯧쯧, 방이 좁냐아?" 혀를 끌끌 차신다 기우뚱 잔 두 개가 서로 버텨 바닥이 떴다 귀여운 우리 엄마 시크한 유머감각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막둥이 난 스무 살 엄마랑 내가 웃던 사십 년 전 이야기다 늦둥이 나를 갖고 마흔이 서러웠다던 "너 없이 어찌 살았을꼬…." 엄마 없이 나 산다 *남문시장. 수원에 네 개의 성문이 있는데 그 성문 안에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문안(門內)장이라 불렀다. 2021 가을호 ♡♡/발표연시조 2021.09.25
어머니와 꽃비 / 김영주 어머니와 꽃비 김영주 하늘은 파아랗고 꽃비 살짝 내려주시고 욕심이라면 요런 날 똑 요런날 가고 싶어야 하늘서 날 받아줄랑가 고 속내는 몰라도 ♡♡/발표단시조 2021.06.27
0세권 / 김영주 0세권* 김영주 역세권 숲세권 학세권 다 옛말이다 편세권*에 팍세권 도세권에 토세권 병세권 주세권 정도는 슬세권에 밀린다 바다 전망 해세권 호수 조망 호세권 스타벅스 스세권 맥도날드 맥세권 붕어빵 붕세권 위에 호떡 있다 호세권 다 있어요 다세권 도시인프라 옆세권 욕 많이 들을수록 집값 올라 욕세권 강아지 산책코스도 당당하게 견세권 빈손으로 왔다가 빈주머니로 가면서도 몰세권 쓱세권에 목을 매는 사람들… 도심 속 장례식장은 연중무휴 성업 중 * 도보로 5~10분 거리에 주요시설 이용 가능한 곳 * 편세권(편의점), 팍세권(공원), 도세권(도서관), 토세권(토스트, 토익), 병세권(병원), 주세권(술), 슬세권(슬리퍼 생활권), 몰세권(쇼핑몰), 쓱세권(쓱배달) ♡♡/발표연시조 2021.06.27
그러므로 유죄 그러므로 유죄 김영주 꽃들은 그 누구와도 작당한 적 없다는데 거사를 도모한 듯 들불처럼 일어난다 곁에 곁 옆구리 찔러 꼬드긴 듯 홀린 듯 만산에 꿈틀대는 진달래 매화 철쭉 설장구 둘러메고 신들린 양 번지는 꽃 삼동(三冬)을 흔들어 깬 죄 그러므로 꽃, 유죄! 2021 봄호 ♡♡/발표연시조 2021.04.20
가난한 사랑에게 / 김영주 가난한 사랑에게 김영주 세상 허물 다 덮을 듯 눈은 내려 쌓이지만 언젠간 그칠 것이고 녹아 흐를 것이고 볕들면 순백의 결속 무너지고 말 터인데 너랑 나 붙안으면 서로에게 스며들어 모나고 패인 곳들 궁굴려야 하는데 겨워도 그럴 수 있겠니 손 놓지 않을 수 있겠니 2013년 11월호 ♡♡/다시 꺼내보는 나의 시 2021.02.13
그런 법 / 김영주 그런 법 김영주 법을 모르는 사람은 법 무서운 줄 알지만 법을 어기는 사람이 법대로 하라 큰소리친다 법 없이 살 사람들만 법 앞에 불공평하다 2021 연간집 ♡♡/발표단시조 2021.02.07
넵! / 김영주 넵 김영주 수면은 무얼 믿고 저리도 견고한가 저 넓은 강폭 위를 안한자적 떠다니는 한 무리 외로운 백조 물밑이 더 분주하다 이 시대의 아들딸들 어법이 짜안하다 설정인 듯 시류인 듯 담백하게 내뱉지만 넵! 하는 결기어린 구호에 을의 설움 들어있다 온기를 말아먹는 비정한 비읍받침 '네'로는 미진하고 '예'하려니 허기져서 읍! 하고 닫아거는 빗장 만감이 측은하다 *직장인들이 상사의 부름이나 지시에 '넵'으로 대답하게되는 증상의 '넵병'이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넵, 넵! 넵~ 네엡...' 등 직장인의 정신적 고충을 수십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2021 연간집 ♡♡/발표연시조 2021.02.07
김문억 선생님이 읽어주신 김영주의 <젖> 젖 김영주 대형마트 냉장코너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우유와 요구르트 치즈와 크림 버터 저 많은 유제품들은 어느 몸에서 나왔을까 처음엔 몰랐었다 알면서도 아니, 몰랐다 새끼 가진 어미만이 젖을 낼수 있다는 것을 죄 없이 스러져가는 송아지 보고 알았다 젖 물려본 어미는 안다 뭉클한 복받침을 찌르르 젖이 돌 때 눈물도 펑 도는 것을 어미소 큰 눈망울에 눈물 그렁 고였을 것을 ------------------------------------ 오늘 아침 배달된 시조시학 여름호에 올라있는 김영주의 작품이다 젖 이라고 하는 제목부터 조금은 파격적이다 그래서 좋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감동하여 눈여겨 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소설이 선명하면서 시종일관 사랑이라고 하는 주제가 따듯한 작품이다 시 독자들.. ♡♡/발표연시조 2021.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