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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열린시학 겨울호 시조 계간평

꿍이와 엄지검지 2014. 2. 12. 14:17

 

2011년 열린시학 겨울호 시조 계간평

 

 

그리움, 맵거나, 쓰거나 혹은 흐리거나 

 

박지현

 

시작이 절반이라 하지만 한 해를 보내는 지점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시작’이라는 테잎을 끊자마자 시작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을. 하지만 시작은 늘 새롭다. 끝의 반환점을 돌아 시작은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사실 순환의 운명적 고리는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분간하기도 매우 어렵다. 중간 중간 번호를 붙여도 그 번호 마저 순환이라 종당엔 시작과 끝의 지점이 서로 합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늘 가슴 벅찬 일이다. 어차피 반복일지라도 시작이라는 푯말은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끝은 늘 가슴이 아리다. 그러니까 시작과 끝이라는 법칙 아래 우리의 가슴은 자주 벅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 이면엔 지나간 시간을 향한 아쉬움에 소멸과 상실에 나를 맡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해를 보내면서 새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삶을 유지하려는 동기와 삶을 창조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두 동기야말로 사람을 보다 넓은 방향으로 작동하게 한다. 수면, 식욕, 배설 등은 필수적 욕구들로 인간의 삶에 가장 필수적인 1차적 욕구라면, 자기를 완성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욕구는 2차적 동기가 된다. 2차적인 동기 즉 고차원적인 동기는 곧 메타 동기화(meta-motivation)된 삶을 일컫는다고 하는데 자칫 실현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욕구 불만이나 불안과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 메타 병리(meta pathology)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입장은 일반인과는 분명 선을 긋게 된다. 병리적 현상에 자신을 쉽게 내맡기지 않는다. 빠르게 덮여오는 시간의 조임에 그 불안적 요소를 오히려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펼쳐드는 것이다. 아래의 시인들의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리움’, ‘애증’의 경우, 결핍과 상실을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전환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해송, 전연희, 강문신, 정경화, 김경태, 김영주는 각기 처한 메타 병리적 현상에 온몸을 내맡기는 듯 하면서 그 속의 새로운 욕구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나씩 살펴본다.

 

누가 하얀 대낮에 저 쑥을 달이는가!

내게 안긴 쓴맛을 고이 받아 삭이노니

풀물 든 유성음들이

애증 너머 울려오다

 

풀벌레 울음 속에 뼈가 선 논쟁들도

사금 씻는 소리로 쟁쟁한 하늘능선

환부를 도린 마음에

새살 같은 달이 뜨다

—정해송 「쓴맛 이후」전문 (『우리시』2011. 9월호)

 

이 시는 얼핏 보면 날선 삶의 한 순간을 토로하고 있는 듯하다. 제목 「쓴맛 이후」가 함의하는 것이 상처 혹은 부딪침에 의한 지독한 상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첫 수에서 ‘누가 하얀 대낮에 저 쑥을 달이는가!’하고 강한 어조를 보이는데 ‘쑥’에 은유되는 쓰라린 상처의 현장을 시의 전면에 내세우며 특히 ‘누가’의 누구에 대한 강한 의도성이 내포되어 있다. 시인이 그 대상을 모르는 바는 아닐 터이나 그렇다고 굳이 호명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게 안긴 쓴맛을 고이 받아 삭이노니’에서 그 이유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 준 이가 누군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공중에서 날아온 화살은 내가 잘 막으면 그뿐, 그 뒤처리는 온전히 나의 몫이기에 철저하게 내 속에서 용해하면 그뿐인 것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애증’이라는 시어다. ‘풀물 든 유성음’이 애중이라는 큰 덩어리를 거쳐야만 내 귀에 당도한다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종당엔 내 속에서 삭히기 마련이겠지만 인간의 오욕칠정은 피해갈 수 없다. 가을철 풀벌레 울음은 처량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청각은 풀벌레의 서정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하며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느리고 부드러운 틈 사이에 날 선 논쟁은 서로를 겨누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언제나 첨예한 대립은 부드러움과 날 섬에서 온다. 이때 모순의 현실은 마음 깊이 내재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게 한다. 첫 수에서 ‘내게 안긴 쓴맛을 고이 받아 삭이’는 것과 둘째 수‘환부를 도린 마음’이다. 환부를 스스로 도려낸다는 것은 매우 처절하고 비장하다. 시인은 애써 상처의 현장을 비켜서는 듯하지만 ‘새살 같은 달’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음을 확인하게 한다. ‘쓴맛’이후가 제대로 달다는 것을 안다.

 

절편처럼 납작하게 갈비뼈에 새긴 시를

참회하듯 읊조리는 어머니 낮은 기도

돌이켜 아프지 않은

그런 날이 있었을까

 

몸보다 무거운 짐 덜지 못한 버거운 정

눈물도 너무 가벼워 삼켜내던 울음소리

당차게 길을 열수록

덮쳐오던 물너울

 

이만한 매운 맛이 어디 그리 흔하냐고

태양초 골라 닦아 지에밥, 익힌 매실

엷어진 등을 구부려

아직 장을 담그시는

 

열여덟 꿈은 길어 잠속 꽃을 가꾸시네

고집도 숙으시고 할 말 많이 놓으시네

가시밭 끝없는 길을

이제 가만 어루시네

—전연희 「어머니 시편詩篇」전문 (『우리시』2011. 9월호)

 

문학의 소재로 어머니만큼 많이 다룬 소재가 있는가. 시를 쓰는 시인의 경우, 한 편 이상 어머니에 관한 작품을 썼을 것이다. 전연희의 경우, ‘어머니 시편詩篇’으로 아예 제목을 한정시켰다. 연작으로 쓸 요량으로 보인다. 이제 자리에 누워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은, 오히려 점점 소멸해가는 육신을 마주하고 있는 시인의 눈엔 어머니가 살아온 지난 길이 우리나라 전도처럼 한눈에 보인다. 이 시 첫 수 첫 구절은 매우 빼어나다. ‘기도’를 ‘절편처럼 납작하게 갈비뼈에 새긴 시’로 보았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에 최종 방어벽이 있다. 신체의 중요장기를 감싸고 보호하기 위한 갈비뼈는 어머니의 지난한 삶의 최종 보호막이었을 것이다. 그 갈비뼈에 새긴 오욕의 지난 삶들.‘참회하듯 읊조’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날들은 딸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한 편의 기도로 들렸음이 틀림없다. 실제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는 이제 낡고 쓸모없는 육신을 벗어놓고 다른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의 존재란 영원한 그리움의 존재이며, 가까이 있으되 결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며,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늘 옆에 있어서 어디로 가지도 않고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만 같은 어머니는 어느 날 불현듯 내 곁에서 떠난다. 문득 돌아보면 어머니는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몸뚱이로 변해 있으며 가장 낮은 곳에 누워 스스로 제 몸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태양초’로 장을 담그시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떠나보내야만 하기에 시인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내 속에 철마다 담그는 장처럼 꾹꾹 어머니를 화인으로 눌러 앉히고 있다.

 

안개였다 파도소리 울림만 사무치고

섬도 배도 숨비소리도 없는 서귀포 바다

그 빈 손 꼭 쥐고 가던 한 치 앞도 안개였다

 

아득바득 헤쳐 온 그 반생이 안개였고

내일, 내일이라지만 내일 또한 그러 할 터

어차피 농사차 행로 뭇 안개에 길들여진

 

저마다 가는 길을 여여히餘餘히 가는 길을

“무슨 연유인가?” 하신들 쉴 수 없는 바다

그 여정 지친 날들의 그리움도 안개였다

—강문신 「안개」전문 (『시조시학』2011. 가을호)

 

강문신의 시를 통해 제주도의 안개를 생각한다. 제주 서귀포 바다를 덮어버린 안개는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파도도, 섬도, 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리만 남아서 파도가 남기는 소리만 귀에 여울지는 것이다. 이럴 때 해녀들도 바다에 가지 않는다. 따라서 숨비소리도 없다. 생계의 현장은 철저히 버려져 있는 것이다. 안개가 다 거둬가버린 것이다. ‘그 빈손 꼭 쥐고 가던 한 치 앞’을 시인은 다시금 안개에 비유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안개의 다의적 표현을 통해 내 앞에 놓인 삶을 말하고 싶다. 네 앞에 놓인 삶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다에 기대 살아가는 섬 사람들은 안개가 덮인 날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안개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인생의 삶도 그러하다. ‘아득바닥 헤쳐 온 그 반생이 안개’라든가, ‘내일, 내일이라지만 내일 또한 그러 할’것이라는 안개처럼 막연하고 대책없는 것이라든가, 그나마 지금의 농사는 주저앉을 수 없어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데 그것도 ‘뭇 안개’에 깃들여져 살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바다는 오래 전부터 섬사람의, 또는 갯가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니 그저 자연현상에 온 촉각을 곤두세워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 세상이 안개투성이이면 우리의 삶도 그러할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토로한다. 이 안타까운 토설에는 그 어떤 것도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안개 낀 날들이 어디 하루이틀인가, 너와 나의 관계 역시 그렇다.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인간의 나약한 정조가 그렇다. 그러니 곧 다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저 안개를 향해 달려야만 한다. 안개 속으로 현재의 삶을 풀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강문신의 안개는 그래서 신선하다.

 

베개보를 빨 때마다 조금씩 물이 빠진다

고운 꿈 수놓아 준 엄마의 붉은 십자수

슬며시 버리려다가 또 다시 헹궈낸다

 

저 색실 다 바래지면 둥근 달이 떠오를까

불면이 깊을수록 축축한 머리맡에

새들도 떠나간 자리, 보풀 이는 꽃무늬들

 

찰방찰방 물빛 사이 녹아있는 슬픔보다

낡아서 더 귀해진 목소리를 듣는다

가만히 온 몸을 열고 나를 다시 물들이며

—정경화「다시 물들다」전문 (『시조시학』2011. 가을호)

 

이 시 역시 어머니가 소재인데 ‘베개보’를 통해 어머니를 불러내고 있다. 이제 내 옆에 없는 부재의 어머니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부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움’은 현재형이 된다. 혹여 혼수로 장만해 준 베개보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제는 수십 년이 흘러 낡아 더 이상 빠질 물감이 없을 정도로 낡았다. 그러니 그 수명이 다했다는 생각에 버릴까 하는 단순한 판단을 한다. 하지만 곧 시인은 이미 베개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를 불러내었다. 물감이 빠져 달아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는다. 물감 빠진 그 자리를 빌려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고운 색실에서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존재를 와락 움켜쥐고 ‘버리려다가 또 다시 헹궈’내며 꼭 끌어안게 된다. ‘저 색실 다 바래지면 둥근 달’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간절한 소망도 해본다. 작금의 불면의 현실은 나를 더욱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새들도 떠나간 자리, 보풀 이는 꽃무늬’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구절은 베개보를 극대화시킨다. 어머니에 대한, 어머니의 부재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의 삶에 비어버린 그곳은 분명 색실처럼 물감이 빠져나가버린 부분일 것이며, 숱한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빠져나간 시간의 실타래를 확인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온 어머니를 불러내는 것이 된다. 베개보에 응축된 어머니와의 시간과 젊은 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빠져 달아난 색실의 물감에 대응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귀를 기울인다. ‘찰방찰방 물빛 사이 녹아있는 슬픔’을 건너 내재된 오랜 소리의 울림을 듣는다. ‘낡아서 온 몸을 열고 나를 다시 물들’이는 행위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기억 너머, 그리움 너머 내게로 다시 안착한다. 내 속에 내재된 어머니는 쇠잔하고 낡은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물감처럼 빠져 달아나게 버려두지 않는다. 거둬들여서 ‘나를 다시 물들이’는 적극적 의지로 확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폭풍이 지난 자리

그대가 떠난 자리

희미한 호흡으로 오랜 침묵을 삼킨다

바람은 말없이 불어 돌아앉은 푸른 밤

능선을 따라 울리는 그대의 뒷모습

어긋난 바퀴처럼 기우뚱 길을 돌아

바위 틈 깊어진 주름

눈앞에서 휘청인다

두고 온 기억마저 차가워진 하늘아래

저 혼자 뒤돌아선 달무리 저편 너머로

비바람 신열을 두르고

사라져가는 汽笛의 시간

—김경태 「템페스트 소나타」전문 (『열린시학』2011. 가을호)

 

사람과 사람은 관계는 이별에서 시작된다. 떠나야 그 빈자리를 알게 되고 만남의 의미가 더욱 명약관화하게 된다. 폭풍에 대응시켜 ‘그대’를 불러내어 나를 들여다보는 이 행위는 폭풍만큼 연속적이다. 휘돌아 치는 강한 힘에 눌려 그저 가만 ‘침묵을 삼키’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멀리 세상을 강타하고 산등성이를 몰아세우며 성큼성큼 걸어간 곳엔 어김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어긋난 바퀴처럼 기우뚱 길을 돌아/바위 틈 깊어진 주름’을 시인은 확인한다. 나를 떠난 그대는 무자비하다. 그냥 가는 법이 없다. 온통 주름과 상처를 입히고 자신의 흔적을 곳곳에 장치하며 기억을 재정비시키는 것이다. 굳이 등 떠밀지 않아도 폭풍은 제 스스로 물러날 때 물러난다. 그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 속에 잠겨 있는 기억은 또 어떠한가. ‘두고 온 기억마저 차가워진 하늘아래/저 혼자 뒤돌아선 달무리 저편 너머로’사라져간다. 모든 것은 시간의 경과를 기다린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무방비의 상태로 몰아가며 이전의 흔적들을 털어낸다. 얼마간의 풍화작용을 거쳐 낯선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인은 알고 있다. 폭풍이 몰려왔다 몰려가는 것의 의미를. 어느 날 그냥 내게 왔다가 이유 없이 그냥 떠나버리는 것을. 사실 어떤 일이든 이유가 있다고 하는 논리성을 전제한 주장은 허위일지 모른다. 이 세상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당위를 따지고 든다는 자체가 인간 사고의 안이하고 획일적 기능에 다름 아니다. 이유 아닌 이유의 황당한 가설을 들이대며 주장을 위한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과학적 타당한 근거는 우리 삶에 일부만 필요한 법이다. 어느 날 홀연히 그대가 떠나는 것에 과학적 근거가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 떠난 빈자리에 남긴 상흔에 어떤 과학적 근거를 들이댈 것인가. 단 시인이 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 끌어안으며 다음 삶을 위한 힘으로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아버지 양복 주머니엔

늘, 명랑이 들어있었다

 

늦둥이 내 호기심도

명랑만 보면 명랑해졌다

 

혹, 명랑 덕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명!

랑!

하셨다

 

지금은 약국에서 명랑을 팔지 않는데

아버지 명랑 없이도 그곳에서 명랑하실까

 

약국 앞 지날 때마다

궁금하다

명랑

—김영주 「명랑明朗」전문 (『열린시학』2011. 가을호)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이 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두통약 ‘명랑’을 통해 발현시키고 있다.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시대는‘명랑’뿐만 아니라, ‘뇌신’, ‘노신’ 등의 약도 이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개인적 기호와 두통의 정도에 따라 셋 중 어느 하나를 선호했다고 할 수 있다. 늘 아버지 곁에 호신용 무기처럼 두통을 잠시 잠깐 멈추게 할 ‘명랑’은 어린 시인의 눈에 신기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게 뭐길래 아버지를 한 순간 두통에서 해방시킬까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호기심 어린 어린 시인이 명랑을 삼킨 아버지와 덩달아 ‘명랑’할 수 있었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때의 호기심은 단순하지 않다. 아버지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화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현실에 나의 현실이 이입되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 따숩고 밝았던 한 때가 ‘명랑’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뭔지 모를,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무거운 현실은 매일 두통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주변적 상황과 신체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는/명!/랑!/하셨다’를 강조함으로써 그 문제의 일시적 해결점이 명랑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러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암시를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한 편의 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성의 폭은 사실 그다지 넓지도 크지도 깊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곳곳에 편재한 시어나, 시어의 압축적 의미와 행간의 여백에 따라 연속적 의미와 맛을 길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시의 경우는 넷째 수의 ‘아버지는 명랑하셨다’에서 특히 ‘명!’, ‘랑!’에 느낌표를 각각 달아 새삼 강조함으로써 반어적 느낌을 강하게 불러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이라는 말과 흡사한 느낌의 굳이 그 이면을 들출 것 없다는, 비극적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깔아놓은 셈이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명랑도 더 이상 팔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은 늘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재생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곳’에 계신 명랑 없이 지내실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 궁금증은 다시 그리움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그 때가 밥을 할 때이거나, 먹을 때이거나, 집안 일을 하거나, 회사 일에 열중할 때이거나, 달리거나, 걷거나 기차를 타거나 골목길을 걷거나 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득문득 아무 때나 들이대는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유용한 자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꼭 필요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기본적 두 동기가 다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야만 확장되고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장치를 타고 전달되는 감정의 극한점인‘그리움’과 ‘오욕칠정’ 만큼은 기억과 꼭 붙어 다니는 것이어서 인간에게 도무지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활력소이자 에너지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완성된 시를 앞에 놓고 한층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1996년《시와시학》(시),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으로 《저물 무렵의 詩》외 4권과 논문 「일제강점기 저항시의 주체 연구」등이 있다.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8년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0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아주대, 호서대 강사. hlm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