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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키 작은 2월에 듣는 짧은 시 긴 이야기

꿍이와 엄지검지 2011. 5. 6. 08:34

키 작은 2월에 듣는 짧은 시 긴 이야기
지상중계 | 유심시낭독회
[49호] 2011년 03월 10일 (목) 김택희 시인

편집자

   

 

2011년 2월 10일 오후 7시     
■ 유심아카데미 세미나실

 

열두 달 가운데 가장 키가 작은 2월.
그러나 2월이 없으면 3월과 봄도 없다.
2월은, 폴짝폴짝 뛰어서 봄으로 가는 징검다리,

그 작은 징검다리에서 시를 나누고 즐기는
아름다운 자리이다.

 

짧은 시로 긴 생각의 길을 열어 주는
서정춘 시인과
명징하고 찬연한 시어들로 삶의 기운을 얹어 주는
유정이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또 《유심》 출신 문인들의 모임인 유심문학회 회원들의 열정도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림은 사랑이었다. 행사 시간 30분을 남겨놓고는 긴장증후군에 시달린다.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들은 늘 그렇다. 그러나 불안은 기우였다. 삼삼오오 달려온 시인들의 걸음에 금방 자리는 차고 넘쳤다. 새해 첫 유심시낭독회,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2월의 낭독회는 《유심》을 통해 등단한 사람들의 모임인 ‘유심문학회(유심모)’가 주최했다. 우리는 지금 세계가 손안에 들어 있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시낭독회에서 아날로그로 만나는 얼굴들은 언제나 반갑다.

 

진행을 맡은 이승현 시인은 인생을 산으로 비유한 객담으로 시낭독회의 문을 열었다. 강인한 시인, 김추인 시인, 김영탁 시인, 신승철 시인, 윤범모 시인 등을 소개하고 “여기 앉으신 모든 분이 내빈”이라며 박수를 유도했다.

 

부드러워진 실내의 분위기, 시낭독회의 첫 순서는 초청연주였다. 김준모 씨의 한국식 오카리나와 김초선 씨의 바이올린이 청중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오카리나 특유의 음색에 바이올린이 어우러져 관객을 환상적인 세계로 끌고 갔고 청중은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였나? 김영주 시인이 김준모 씨의 오카리나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알퐁스 도테의 ‘별’의 일부를 낭송하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중생계의 사람들 같지 않았다. 뒤를 받쳐주는 오카리나도 한몫했지만, 김영주 시인은 역시 프로였다. 잘 소화시킨 시스루룩에서부터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줄줄이 암송하는 모습에서 열정과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목동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구는 목동이 되었고 또 누구는 아가씨가 되어보는 시간이었다.

 

“어머나! 별들도 결혼을 하니?”
“그럼요, 아가씨”
 
그리고 나서, 그 결혼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주려고 할 때, 나는 무언가 싸늘하고 부드러운 것이
살며시 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가씨가 그만 졸음에 겨워 무거워진 머리를,
리본과 레이스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비비며,
가만히 내 어깨에 기대 온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는 먼동이 환히 터 올라
별들이 해쓱하게 빛을 잃을 때까지
꼼짝 않고 그대로 내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꼬빡 밤을 새웠습니다.
가슴이 설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맑은 밤하늘의 보호를 받아,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서는 총총한 별들이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양 떼처럼
고분고분하게 조용하게 움직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숱한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곱게 잠들어 있노라고……     
                          ―알퐁스 도테 〈별〉 중에서

 

이어지는 시는 초청 시인 서정춘 시인의 〈종소리〉와 〈빨랫줄〉이었다. 유심문학회 회원인 김대봉 시인이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시를 낭독한다’는 고백을 하고 두 편의 시를 큰소리로 낭독했다.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서정춘 〈종소리〉 전문

 

김대봉 시인은 “돌아오지 말아라” 부분을 힘주어 읊었다. 시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종소리는 분명 산 너머 항아리가 되어 앉을 것 같았다. 덩달아 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서정춘 〈빨랫줄〉 전문

 

빨랫줄이 출렁거렸다. 머잖아 올 봄바람에 푸른 힘줄이 솟고 연분홍 치마가 나풀거렸다. 무관할 것 같은 〈종소리>와 〈빨랫줄〉이 어우러져 선명히 귀에 들어온다는 사회자의 멘트에 다음으로 건넜다.

 

공중비행하며 세상을 바라보네
결코 지면에 앉는 일이 없지, 나는
하늘을 가르며 점점 단단해지는 가장 작은 새
온몸이 팽팽해지고 용기가 넘치네
두려움 모르는 나의 날갯짓에
검은 그늘 번뜩이는 매도 떠밀려가고 만다네
나는 꽃과 입 맞추는 자*
당신의 어깨 뒤로 태양이 뜰 때
목부용 꽃 앞에 가만히 떠 있네
꽃 속의 미로를 헤집던 가늘고 긴 부리
꽃가루를 지천으로 묻힌 채
이슬 젖은 나뭇잎을 뚫고 세상의 폭포를 지나가네

나는 지금 꽃의 나날
연분홍 봄을 보며 독도법을 익히리
비바람 천둥번개가 북적거리는데
나의 배 밑에는 짙푸른 여름이 깔려 있네
천변만화의 계절을 피우기 위해, 나는
무지개 날개를 반짝이며 수만 개의 눈을 크게 뜨네

* 브라질에서는 벌새를 ‘꽃과 입 맞추는 자’라고 한다.
             ―박미산 〈날아라, 수만 개의 눈으로〉 전문

 

박미산 시인은 낭송에 앞서 〈날아라, 수만 개의 눈으로〉는 ‘내가 20대라면 이렇게 하겠다.’라는 뜻이 담긴 내용이라고 언급했다. 시인을 보며 ‘통섭’을 떠올렸다. 태껸의 고수로도 알려진 박 시인은 낭독하는 시 속의 삶처럼 현재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구름이 원자재를 공급한다.

보름달이 두 다리 걷고 내려와
거들어 준 지난밤, 야근
겹겹이 쌓인 신제품
산화(酸化)되기 전 빨리
지상으로 감아올려 보내야 하는,

새벽 바쁘다.

도로가 정체되기 전
장미꽃집으로, 소아병동 가습기용으로
제시간에 배달해야 한다.

시뻘건 해가 기업사냥에 나섰다는 소문
포장 특허기술 개발이 시급하다.

올가을에는 생산량이 많아
보너스 타면 무진기행을 가야겠다.
                             ―이석란 〈물안개〉 전문

 

 

“보너스 타면 무진기행을 가야겠다”에서 높아진 톤에 한 번 더 좌중을 웃음으로 이끌어 낸 사람은 이석란 시인이었다. 이 시인은 사는 곳이 ‘경남 창원’인데 교통체증이 걱정되어 이틀 전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 웃음과 함께 《유심》 출신임을 확실히 상기시켰다. 조신하게 낭독하다가 자신의 물안개에 그만 취했는지 당장 어디로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목소리로 들떠 있었다.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라는 첫 시집을 들고 배성희 시인이 《유심》을 찾아왔다. 행사에 동참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첫 시집을 선사한 배 시인은 시집 속에서 고른 시 〈코의 전성기〉를 낭송했다

 

장대비 퍼붓는 여름 엄마 무릎 베고 누워
마당을 보면 빗줄기는 미꾸라지로 변해
몸부림치고 흙바닥은 폭폭
구멍투성이 낙서장이 되었다 아직
내가 눈(眼)이었을 때

하룻밤 자고 나면 바람에
떨어지던 새하얀 감꽃 맑은 향기 솔솔
나무 언저리에 쌓여 개울에서 금방 씻고 나온
진주 아지매 젖 냄새처럼  달콤했다 아직
내가 코였을 때
 
색동옷 차려 입고 세뱃돈 받던 날 꽝꽝
두꺼워진 저수지 얼음판에서 심술장이 오빠는
혼자만 썰매 타고 내 혓바닥에
고드름 달랑 올려놓고 뛰어갔다 아직
내가 입이었을 때

햇솜이불 소리 사각이던 밤 화롯가
피어오르던 연기 사이로 처녀는 우물에 풍덩 빠지고
굴에서 기도하던 무당은 불곰에 물려죽고 맴맴
속삭이던 귀신노래 듣느라 단잠을 설쳤다 아직
내가 귀였을 때
         ―배성희 〈코의 전성기〉 전문

 

‘제목만 보아서는 코골이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사회자의 썰렁한 유머에 이어 초청 시인 유정이 시인이 등장했다.

 

그리워 죽겠는
보고 싶어 미치겠는
이름 하나 유리창에 빨래처럼 매달고
빨래가 얼며 녹으며 마르는 동안
눈에 가득 서리가 들어찬다
당신 너무 추운 곳에 있었군
날개가 다 얼었어
어느새 손바닥 하나 덮일 입김 다 써버리고
꺼내어 쓸 아무 온기도 없는데
안으로 들일 수 없는 당신이
밖에 세워둘 수도 없는 당신이
거기 얼음옷 한 벌 지어 입고와 서 있다
어깨를 웅크릴 때마다
껴입은 옷의 관절 우두둑 소리를 낸다
귀퉁이부터 뚝뚝 닳아지는 당신
뒤에서 끌안고 섰는 허공이 아프다 아프다
소리 없는 소리를 참고 있다
               ―유정이 〈대설주의보〉 전문

 

 

눈이 내리면
내리는 눈처럼 당신의 겉옷을 벗겨주리
겉옷을 벗겨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누워 천년 묵은 잠을 자도 좋으리

그러나 한 겹 한 겹
하염없이 벗겨도 자꾸 자꾸 당신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내린다

자꾸 내리는 당신이 있어
나 거기 시원도 알 수 없는 품에서 길을 잃는다
차선도 덮어 지우고
빨간 신호등도 덮어 지우고
던킨도너츠 입간판도 지우면
입까지 차오른 그리움도 아득히
덮여 지워질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내리는 당신이 사랑이라면
끝없이 벗겨야 하는 겉옷이 당신이라면
나는 지금 끝나지 않을 연서를 쓰는 중
지금까지 내린 연서를 모두 덮어 지우는 중
                         ―유정이 〈폭설〉 전문

 

 

 

초청 시인인 유정이 시인이 내리 두 편을 낭독했다. “시를 쓸 때, 단어의 중복을 피하는 것이 좋은 시라고 들었는데 ‘당신’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으니, 여러분은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시를 들은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폭설이 내렸을 때, 그 눈들을 시로 많이 옮겼어요. 그 눈이 따뜻하고 포근하기보다는 아프고, 차갑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런 시로 드러났습니다. 남들이 그래요. 행복할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요. 여기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행복한 얼굴로 앉아 계셔도 시를 쓴다는 것은 다 아픔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저에게 15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시를 잘 몰라서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말 어렵고, 무겁고, 힘들고, 무궁한 시를 15분 안에 줄여서 말하려니 그렇습니다. 풀어놓는 것보다 응축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문학의 이론 등은 많이 아실 테니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게 있어 문학은 거짓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초등 2학년 때, ‘어머니’에 관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고 나를 예뻐해 주시는 선생님의 맘에 들기 위해 중 2였던 외삼촌한테 가서 무작정 울었어요. 그렇게 해서 구한 숙제를 보고 정말로 네가 썼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우물쭈물 그렇다고 답한 죄로 정말 잘 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란 그 속에 없어 보이는 것은 만들어서 보이게 하고, 진실이지만 진실 아닌 것을 까뒤집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입니다.”

 

유 시인은 “시는 내성이 강한 바이러스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존재”라며 단단하고도 단아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시’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온 것은 현실적인 행복을 지향하기보다는 마음속의 아프고 고단한 것들은 달래주기 위함이 아니겠느냐며 시 쓰기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시낭독회 초대의 글 중 유정이 시인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명징하고 찬연한 시어들로 삶의 기운을 얹어 준다고 했는데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표현이 매우 적절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 자작시를 낭송한 시인은 배재형 시인이었다.

 

 

한나절 버려졌던 밥그릇은 지난밤 눈이 쌓여 팥빙수 같았네. 시간의 의식주를 한바탕 소리 지르면 달그락거리던 밥그릇은 깊은 사색으로 가부좌 틀고, 복음 같은 주둥이 박고 두 손 모으네.

하루를 더듬는 아득한 저녁을 숨기네. 바람은 지붕에 앉아 숨긴 저녁을 찾고 있네. 경비 일을 시작한지도 벌써 3년 전, 이 집은 직장이면서 또한 관저이기도 한, 하루 종일 囚人의 공간. 문패도 없는 집의 망명은 길고도 지루하게 영역만을 새겨 두었네.

늦은 만찬을 수돗가 한 모금 물방울로 끝내는 시간, 字幕처럼 어둔 허물이 내려지고 나무 위 웅크린 시간의 꽃, 지네. 깨어 있어야 하네. 이 밤을 지키려면 멍멍멍, 우우. 뚝딱 숨어 버린 밥을 찾아서 울부짖네. 밥을 잃어버린, 숨은 밥을 그리워하는 앞마당 똥개의 깊어가는 밤.
                                                            ―배재형 〈숨은 밥〉 전문

 

유심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야쿠르트에 근무하면서도 그동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스럽다고 인사를 했다. 이어 홍보팀에 근무한다며 건강에 좋은 야쿠르트를 많이 애용해 달라는 광고로 분위를 업(Up)시켰다. 좌중에서 젊고 건강한 웃음이 넘쳤다. 낭독한 〈숨은 밥〉은 경비 일을 하는 지인의 마음이 되어 쓴 시라고 소개를 했다.

이어 등장한 정정례 시인이 자작시 〈공원〉을 차분하게 암송하는 동안 홀에는 공원에 있는 초록 잎과 작은 과일 그리고 새들까지 날아들어 싱그러움이 넘쳤다.

 

저기,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라

초록 잎들이 어우러져 내주는 그늘을 덮고

흔들릴 때마다 묻어나는

나뭇잎들의 푸른 향기를 보라

가지 사이 줄기들 엇갈리며

나무와 나무가 잇는 길을 보라
 
버찌 살구 앵두 자두 같은 것들

분수껏 몸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것 보라

새 한 마리 기웃거리며 열매를 쫄 때
 
한 작은 흔들림 위에서 새가 훔쳐 먹는 시간을 보라

그 톡톡 거리는 재미를 보라

그걸 지켜보는 나무의 저 느긋한 재미를 보라
                                     ―정정례 〈공원〉 전문

 

 다시 오카리나의 시간으로 돌아와 잠시 쉬어 갔다. 김준모 연주자의 ‘독도 가는 길’은 뱃삯도 없는 무료 독도 여행이었다. 수많은 괭이갈매기의 울음을 들으며 삼봉호의 흔들림에 잠시 멀미가 일 듯도 했다. 아울러 탈북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는 연주자는 탈북 아이가 부른 ‘소쩍새’를 들려주었다. 끝으로 아이들의 여의찮은 사정을 알리며 후원 요청도 잊지 않았다.

 

여러 편의 시를 들으며 씻어낸 마음자리에 오카리나의 선율이 꽃을 뿌린 듯, 관객들의 얼굴이 맑게 변했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키 작은 2월에 듣는 짧은 시, 긴 이야기에 초청된 서정춘 시인이 좌중을 둘러보고는 최근에 쓴 시 〈명당〉(이번 호 유심시단 참조)을 읊었다.

 

곱게 일어선 채 “어머니!” 그리곤 정적. 이어져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다음 구절인 “내가 죽었어요”. 반 울음이었다. 〈명당〉은 0.5초 걸려서 쓴 시라고 툭 말문을 열었다. 말이 그렇다고 했다. 대추나무 벼락 맞듯 시를 쓰게 만든 그 어머니는 시인이 두 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힘들게 지냈던 세월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자꾸 뜸을 들였다. 어릴 적 이야기를 풀던 시인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며 가요 〈찔레꽃〉을 구성지게 뽑았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이 노래를 부르다가 쓴 시가 바로 〈명당〉이라고 했다. 아직도 흥분이 된다며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머니에 관한 시는 한 편도 못 썼어요. 이 시는 어머니가 불러 줘서 쓴 시 같아요. 써 놓고 참 많이도 울었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픈 구석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서정춘 시인에게 어머니는 유달리 서러운 존재로 굳어져 있는 듯했다. 어릴 적,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숱한 구박을 받았노라고 털어놓으며 “그때 나는 《장화홍련전》을 열심히 읽으며 계모에 대한 증오심을 키울 정도였다.”는 고백도 했다. 가톨릭 분위기에서 자라났지만, 가톨릭의 정신으로는 살지 못했던 것도.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 ―여행〉 전문

 

“‘죽편(竹篇)’은 내가 만든 말이에요. 대꽃, 또는 대나무, 해도 되지만 좀 더 고상하게 느껴지라고 그렇게 붙였어요. 시편, 옥편 할 때처럼 글 편자입니다. 그저 대나무에 관한 글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아요. 이 시는 4년 이상이 걸렸고 80번 이상 퇴고를 했어요. 등단하고 26년 만에 낸 첫 시집의 제목도 《죽편》입니다.” 서정춘 시인은 이야기 중에 〈30년 전 ―1959년 겨울〉이라는 시 한 편을 더 읊었다.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굵직하고 낮게 깔리는 시인의 목소리를 따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릴 때 나는 일기를 한 9년을 썼어요. 쓴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계모에 대한 미움을 증폭시키려고 썼어요. 어찌나 미웠던지 한 대 맞으면 세 대 맞았다고 쓰고(웃음) 밥을 주면 죽을 먹었다고(웃음) 쓰고, 아주 창작을 했어요. 하지만 그때 생각이지, 나중에는 아버지보다도 계모를 더 잘 모셨어요. 이복동생은 전적으로 내가 키웠고요. 제가 미션스쿨을 다녔어요. 고향이 순천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 가면 누나들이 서정춘이 귀엽다고 하고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렇게 컸어요. 어려웠던 시절, 중고등부 야간학부가 제 학력의 전부입니다. 가방끈도 짧고 게다가 설상가상 키까지 짧아, 그래서 시가 짧아진 거여.”(웃음)

 

문단에서 ‘3단(三短)’으로 통하는 서정춘 시인은 “한때는 아무렇게나 살았다”고 했다. 계모 밑에서 푸대접받고 자랐다는 어린 마음에 보복하겠다는 마음까지도 먹었는데 삶을 180도로 바꿔 준 계기가 있었다고 했다. 서울로 도망가려고 친구 집에 가서 차비 좀 해 달라며 방바닥에 누워 있는데 발에 책 한 권이 걸렸다. 운명의 장난처럼 만난 《부모은중경》. 시인은 그 책을 보는 순간 그만 울음이 터졌고 엄청나게 울었다고 했다. 판소리 가락처럼 구성진 서정춘 시인의 인생역정 이야기는 시 〈죽편〉이 노래로 만들어진 사연으로 넘어갔다.

 

“어느 날, 소리꾼 장사익이 느닷없이 〈죽편〉을 노래로 만들었다고 전화를 하더니 CD를 보내왔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죽편〉을 서정춘 시인이 노래로 불렀다. 문단의 가객으로 통하는 서정춘 시인의 구성진 목소리는 백 년이 걸리는 먼 거리를 푸른 기차를 타고 가는 듯했다. 가객 장사익이 옆에 있었으면 울고 가지 않았을까? 역시 남도의 DNA를 타고 난 시인이었다.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봄, 파르티잔〉 전문

 

 

우리에게는 ‘빨치산’으로 더 익숙한 ‘파르티잔’은 프랑스어라며 어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덧붙여 일본인들의 부정확한 발음에 대해서 민족감정까지 결부시켜 시인 특유의 재치로 풀어가 좌중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파르티잔은 원래 양 치는 사람, 목동이라는 뜻이 있어요. 봄 산은 낮은 곳에서 차츰 위로 파랗게 올라가잖아요. 목동이 풀을 뜯기기 위해 산속으로 차근차근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산사람이 된 것인데 거기에 이데올로기가 더해져 빨갱이가 된 거예요. 〈봄, 파르티잔〉은 원래 가지고 있던 목가적 내용에다 역사의 아픔까지도 아울러 보자는 취지에서 쓴 시입니다. 어찌 됐든 봄이면 파랗게 피우던 싹을 떠올렸어요. 파, 파, 정말 파란 봄을 잘 만들어서 불러보자 이거였지요. 봄, 파르티잔, 얼마나 좋아요, 이거.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시인이 풀어낸 시와 이야기. 짧은 시를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처절한 삶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천둥 같은 고통을 뚫고 번개처럼 나온 시가 아니면 안 될 일이다. 서정춘 시인이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박수로 서정춘 시인의 시와 이야기에 값을 치렀지만,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고 가는 대가치고는 너무 헐하지 않았을까?


이승현 시인이 “오늘의 시낭독회를 마무리하며, 객석에서 듣고 보신 소감을 듣고 싶다”는 요청과 함께 강인한 시인을 모셨다. 

 

강인한 시인은 “유심시낭독회에 오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서너 번 참석했다”며 “오늘의 초청 시인인 서정춘 시인은 우리 시단의 대단한 가객”이라고 말했다. 등단 후, 30여 년간 종적을 감췄다가 〈죽편〉을 들고 재입성한 서정춘 시인의 시를 “극약 같은 시”라고도 술회했다. “짧으면서도 에센스가 들어 있는 시,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시”라며 이 자리에서 보고 싶었고 보아서 기쁜 이름들을 호명했다.
 
우리는 가끔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을 한다. 말 그대로 함께 밥을 먹자는 뜻도 있지만 바빠도 얼굴 좀 보고 지내자는 뜻을 함축하는데 이번 유심시낭독회는 그런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담소하는 정겨운 시간이었다. 시간은 흘러도 오늘의 만남은 시가 되어 또는 추억이 되어 기억될 것이다. 시가 있고 음악과 맥주가, 그리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는 유심시낭독회장은 뮌헨의 멋진 카페가 부럽지 않았다. 

 

 정리/ 김택희(시인)

 

-유심(http://www.yousim.co.kr)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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