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물컹한 그리움 / 임성구

꿍이와 엄지검지 2012. 12. 26. 13:06

* 본 음원은 Daum 배경음악 플레이어를 설치하셔야 들으실 수 있습니다.

 

 

2012-12-26 오전 10:56:08 입력 뉴스 > 문화

임성구의 시조바라기 - 52
임성구 시인의 '물컹한 그리움'

 

  

 

               물컹한 그리움

 

                                             임성구

 

 

까치가 먹다 남긴 홍시 하나 따 먹는다

 

감잎에 싸인 먼 기억이

풍금 현을 조율 중이다

 

아홉 살

검정고무신 소년이

집을 나선

새벽길

 

누군가가 먹다 흘린 라면과자 앞에 서서

사방 한번 둘러보고 잽싸게 집어 들었다

과자의 단 등을 갉아먹던

개미 떼의 목을 베고

 

더 이상 과자이기를 포기한 물렁한 몸

입 안 가득 눈물 돌았다, 풀꽃들이 볼까 봐서

허기진 독수리처럼

허공 높이 날고 싶었다

 

홍시를 먹는 이 순간이 지상의 천국이다

 

물안개 걷어 낸

아버지의 갈쿠리 같은

 

햇살이

끌려간 가지 사이

까치 한 마리 날아간다

 

 

 

 

 

 

 

이월, 임진년 끝단을 잡고 가는 길, 내 몸보다 생각이 먼저 간 길을 옛 슬리퍼 딸딸거리며 가듯 그렇게 내 마음이 딸딸거리며 가고 있다. 내 아이의 카카오톡에 빠진 손가락들이 휴대폰 액정에서 첨벙거린다. 내 생각이 옛 슬리퍼를 끌고 가는 사이와 아이가 휴대폰 액정에서 첨벙거리는 사이 한 장씩 뜯겨나간 시간들의 눈꺼풀이 무겁다.

 

흘려보낸 시간들과 흘려보낼 시간을 두고 가만 키재기 해본다. 고독한 아픔으로 흘려보낸 시간들의 길이는 매우 긴 것 같지만 호탕하게 한 번 웃으면 그 길이가 줄어들고, 눈물 나도록 호탕하게 또 한 번 웃어 보면 어제처럼 짧은 시간으로 다가오는 게 세월이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시간들의 길이는 아무도 가늠할 수가 없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몹시 괴롭고 쓸쓸할 땐 오늘 당장 죽을 것만 같지만, 우리는 또 빛나게 견뎌내는 면역력을 기르며 산다. 위에 소개한 시조는 세상에 내보내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상처를 치유하느냐 덧내느냐? 오래된 염증은 하수구에 쏟아 부어야 새로운 피가 돌지 않겠나 싶어, 첫 시조집 한 쪽 모서리에 구겨 넣은 무청시래기 같은 작품이다. 이 시조가 얼마 전 창원MBC FM100.5mhz 시가 있는 아침에 소개되었다. 온종일 울컥거리는 날이었다. 출근하던 아내도 울컥거렸고 매우 부끄러웠나 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숨기고 타인으로 산다는 것은 진정성이 없다. 삶이 진정성이 없는데 과연 시가 진정성이 있을까. 내 안에 멍울을 풀어내면 낼수록 가장 나를 닮은 시가 계속 샘솟는다. 고독한 시간들도 잘만 데리고 놀면 새로운 취미로 손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저기 키 큰 나무들은 무성한 잎이 제 곁에 있었을 땐, 고독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해봤을 것이다. 제 몸에서 모두 떠나고 난 후 절실히 와 닿는 고독에서 그리움과 함께 내일에 대한 희망을 염원한다. 사람도 곁에 머물러 있을 땐 진정 감사한 마음을 모른다. 떠나고 난 후에 소중함과 그립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시는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결코 쓸쓸하

임성구 시조집<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지만 않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덧없이 행복한 일이다. 비워야 새로운 것을 또 채워 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으로 살 수 있게끔 항상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어 주신 내 부모님이 무척 고맙다.

 

이제 날이 저물어 간다. 참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분분分分이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흑룡을 배웅하련다.

 

올 한해도 아름다운 독자님이 계셔서 저는 더 행복했습니다. 새해엔 더 진한 감동의 꽃을 염원하며 올해 문학사상』12월호에 발표한 저의 졸작 살구나무죽비를 독자님께 소개하며 눈물 나도록 호탕하게 웃습니다.

 

 

 

 

                살구나무죽비

 

 

 

무쇠 같은 하루가 노을에 닿는 시간

시퍼런 몸에 감춰진 찌든 먼지 털어낸다

 

속 비운

살구나무죽비

내 등에서 꽃 핀다

 

꽉 막힌 혈전들이 녹아내리는 몸 속 행간

천 년 전 바람 냄새 스멀스멀 배어들면

 

그 봄을

기억하는 살구

몸의 터널 환하다

  

 

시작노트-

안개가 산허리를 친친감고 살풀이를 시작하는 사이, 접신接神을 낭송하던 설악산 만해마을에 비가 내렸다. 자연과 인간의 언어가 하나 되어 멍울을 푸는 백담사에서 권 시인이 살구나무죽비 세 개를 구입해 하나를 내게 건넸다. 백담사 앞 수심교를 건너면서 콧노래도 살짝 부르고, 살구나무죽비로 등을 두드리는데 어혈이 풀리는 그 느낌이 마치 살구꽃이 피는 것 같았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백담계곡 물빛깔이 참으로 아름다워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끌어안고 한 편의 시를 징검돌에 놓는다.

 

임성구는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여, 1994현대시조신인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가 있으며, 제14회 경남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상남도문인협회 이사, 고향의봄기념사업회 이사, 「석필「영언」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는 힘이 세다 / 안차애  (0) 2013.05.03
봄, 무량사 / 김경미  (0) 2013.03.28
홍시 / 이남순  (0) 2012.12.20
요즘세상 / 나태주  (0) 2012.11.30
신발 / 박현덕  (0) 201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