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문집
서정임
잘 있어라 열쇠를 잠근 문에 마지막 인사를 붙인다 광고지 뒷면 힘주어 쓴 글씨가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
길게 하품을 하는 정오의 골목은 언제나 적막하다 그 골목을 천천히 걸어 나오며 뒤돌아본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파란 대문집, 담장 밖으로 손을 내밀던 넝쿨장미가 붉은 울음을 터트린다
거리의 척도가 마음의 척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단지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정한 사이가 될 수는 없다
걸어서 십오 분이면 도착하는 아파트, 그곳에 사는 아들 내외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손을 꼽아보면 먼 허공을 더듬듯 아득하다 날이 갈수록 맞춰지지 않는 퍼즐, 그들은 들어내지 못하는 무게의 장롱처럼 내 안에 들어앉아 오랜 시간 침묵했다
홀로 잠이 드는 밤이면 온몸이 시리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어둠 속에서 노랗게 복수초가 핀다
마침내 집 한 귀퉁이가 무너진다 기왓장이 떨어지고 벽돌이 떨어지고 파란 대문에 덧칠한 페인트가 벗겨진다 어김없이 대들보를 타고내리는 누수, 언제 지붕 한쪽이 내려앉을지 모르는 불안이 누런 벽지에 못을 박는다
도착한 노인전문요양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래도 혹여 아들 내외가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대문에 붙여놓고 온 그 미련 한 장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서정임 시인의 <파란 대문집>
김영주
수밀도 같은 가슴에 꾸욱 손가락자국 시커먼 멍이 생깁니다.
차라리 찢어지고 깨져서 아팠으면….
문드러져 녹아내리며 파고드는 이 아리고 아린 통증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파란대문집 앞에 망연히 서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꾹꾹 삼키고 돌아서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아, 하필 그 때 담장 밖으로 넘어온 넝쿨장미가 붉은 울음을 터뜨릴 건 또 뭐람.
핥고 빨아 키웠다고 그 아들을 볼모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때 되면 보내야할 섭리를 어미는 알고 있는데 그 때까지 좀 기다려줄 수는 없었을까.
세상 앞에서는 부러질 듯 허세를 부렸지만 돌아서서
'먼 허공을 더듬듯 / 날이 갈수록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풀었다간 /
들어내지 못하는 무게의 장롱처럼 / 내 안에 들어앉아 오랜 시간 침묵하고는 /
동그랗게 몸을 말고 홀로 잠이 드는 어미'를 아들은 정말 몰랐던 걸까요.
혹시, 그 미욱한 놈이 아늑한 제 울타리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미에게 등을 돌리고
엄마, 잠시만, 잠시만, 하고 기다려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요.
어미의 속을 파먹으며 '아프지 않지? 엄마' 하고 묻는 새끼거미처럼요.
아들과의 인연이 어디 이승의 인연뿐일까요.
그 어떤 국면으로도 매듭지어질 수도 없고, 끊어 해체할 수도 없는 순리의 혈연,
그 피로 맺은 인연을 그 아인들 그저 내게 등 돌리는 것으로 막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총명한 녀석이요.
'엄마 말 안 들으면 엄마 도망간다'고 했던 협박도 이젠 먹히지 않겠지요.
그래도 '잘 있어라'고 눈물로 얼룩진 전단지에 어깃장을 놓아 한 장 붙이고
정말로 그 공갈을 실행하러 이제 어미는 떠납니다.
서툴지만 눈물겨운, 이 어미의 연극을, 부디 조금은 아픈 척 하되,
진정으로 아프지는 말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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