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세상편집'] 노란 차
/편집1부장
입력 : 2015-01-25 [20:06:35] | 수정 : 2015-01-27 [13:22:37] | 게재 : 2015-01-26 (29면)

팔다 만 귤바구니가 구둣발에 동그라진다
솟구치는 서러움을 울컥 토해 냈다가
죄보다
죄목이 더 큰 그런 죄를 지었다
김영주 시인이 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및 공무집행 방해죄'란 긴 제목의 시조다.
'죄보다 죄목이 더 큰 그런 죄를 지었다'는 구절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혀 아팠다. 40년도 더 된 기억도 그 구절과 함께 소환됐다.
어릴 때 시장에서 자랐다. 시장 사람들이 '노란 차'라고 불렀던 적치물 단속차량은 어린아이의 눈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시장 양쪽 가게 앞에 그어진 노란 선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었다. 그 선을 넘어 물건을 진열하는 건 불법이었다. 불법인 줄 알지만, 상인들은 먹고살겠노라고 노란 선의 경계를 무시로 넘었다. "노란 차 떴다." 누군가가 크게 외치면 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고래고기에 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손수레에 의자를 올리고 내빼기 바빴고, 몇 개 안 되는 과일을 좌판에 올려놨던 과일 노점상도 기겁하고 과일을 쓸어 담았다. 노란 선을 넘은 불법 진열품은 노란 차의 눈에 띄기 무섭게 화물칸에 실렸다. 생계가 걸린 좌판을 뺏긴 상인은 단속반원에게 악다구니를 쓰거나 통사정을 했지만 '죄보다 죄목이 더 큰 죄를 짓거나' 무력하게 무너질 뿐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시장 한가운데를 개선장군처럼 노란 차가 지나가면 바닷물이 갈라지듯 시장 한가운데가 허무하게 뚫렸다. 법을 집행하는 일이긴 해도 참 야박했다.
40년 된 기억을 떠올리며, 신문을 다시 훑어본다. 부산일보가 조간으로 바뀌고 난 뒤 따뜻한 곁을 내줬던 이웃의 사연이 곳곳에 배치됐다. 매주 화요일 실리는 '내 이웃을 소개합니다'도 이들이 주연으로 나선 지면이다.
천근 같은 몸과 마음도 "수고한다" 한마디에 가뿐해진다는 아파트 경비원 정대기 씨, 학생들의 지지서명 5천 장에 감격해하던 신라대 청소노동자 손인자 씨. 끝없이 밀려드는 1초 손님에게 미소를 잃지 않는 광안대교 요금소 징수원 강신혜 씨, 용왕님 주신 딱 그만큼만 욕심을 낸다는 기장 해녀 김옥자 김혜순 전숙자 씨. 편집기자의 입장에선 하나하나가 제목이 되는 소중한 일상이다. 우리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투명인간처럼 존재해 왔지만, 없으면 잠시라도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임을 새삼 절감한다.
돌이켜보면 '독자중심'이란 말을 입에 달고 신문을 만들어왔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신문에 온전히 담아냈는지는 자신하지 못한다. 신문 지면도 자본과 권력의 크기만큼 발언권을 가져왔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지 못하겠다.
40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연필을 잡는다. 언론이란 완장을 차고 노란 차처럼 앞뒤 살피지 않고 질주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죄보다 죄목이 더 큰 죄를 짓는', 억장 무너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지 주위를 둘러본다. 이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니까.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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