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수원사랑>> 2018 겨울호
고등동집과 수원역
김영주 / 시인(운천고등학교 사서)
돌아오고 싶어 떠난 내 고향 수원
수인선을 자주 탔다. 내 속 어디쯤에 역마살이 숨었는지 나는 꿈에라도 고향집을 벗어나 어딘가에 살고 싶었다. 그 꿈에 일조를 가한 공신이 수원역이다. 수원역에는 동차라 불리는 두 칸짜리 협궤열차가 있었다. 앉으면 무릎이 닿을 듯 좁은 열차 안에서 비린내 가득 실은 고무함지와 팔다 남은 떠리미 물건들을 서로 사고 팔고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소래, 주안, 제물포 등을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다녀오곤 했다. 거기서 시작한 가출의 꿈은 바람과 맞서며 코트 깃을 세우고 집에서 역으로 역에서 집으로 오고 가는 낭만적인 상상까지 이어지곤 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나는 기어코 고등동집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첫 직장으로 지방에 있는 대학도서관에 근무하게 되면서 집을 떠나 혼자 방을 얻어 그렇게도 염원하던 귀향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첫' 가출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첫 단추가 될 거라고는 그 때 생각에 넣지 않았다.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곳은 고향이 었고 고향은 사라지지 않는 존재라고 믿었다.
63년 서호에서. 언니와 나, 하나 건너 막내오빠
수원역
수원역에만 도착하면 공기 맛이 달랐다. 코끝을 파고드는 내 고향 수원냄새, 여독에서 벗어난 안도감도 있었겠지만 고향이라는 내 영역에 대한 정신적 갑질을 맘껏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수원역에서 고등동집으로 가는 길은 눈을 감아도 환한 흑백의 네비게이트 시뮬레이션이 펼쳐진다. 30년 전만 해도 수원역이라고 하면 아는 척을 넘어 친한 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 수원역 거기? 하고.
별나게도 수원역의 집창촌은 유명세를 떨쳤다. 그곳은 전쟁과 가난의 뒷모습이요, 애환이요, 호구지책의 눈물밥을 짓는 곳이기도 해서 '몸을 팔아서라도'라는 말의 의미는 수원역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아프게 다가오곤 한다. 사탕가게처럼 알록달록 치장한
검은 유리벽 안에는 착하고 예쁜, 그러나 욕 잘 하는 언니들이 있었고, 언니들은 늘 껌을 씹으며 아저씨, 오빠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밀당을 했다. 어린 나이에는 버거운 '집으로 가는 길'의 통과의례였으므로 나는 땅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터미널까지 잰 걸음으로 지나쳐오곤 했다.
68년 고등동집. 엄마와 넷째오빠 막내오빠
기억의 소품들
터미널을 지나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태양여인숙이 있었는데 한글을 배우고 간판 읽는 재미를 알아가던 예닐곱 살 적에는 여인숙이란 뭐하는 곳인고, 저 인숙이는 왜 성이 '여'씨인고, 골몰하게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여인숙을 지나 은숙이네 집을 지나 쌍꺼풀 짙었던 상렬이네 파랑대문을 지나 조붓하게 난 골목 끝으로 선비 같은 풍모의 운학이네집이 있었고, 운학이네집 문간방에는 착하디착한 상숙이네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상숙이네 아버지는 짐자전거에 양은솥을 얹은 연탄화덕을 매달고 번데기를 삶아 팔았다. 상숙이네집에만 가면 신문지로 접은 깔때기 봉투가 아닌 칠 벗겨져 얼룩덜룩 찌그러진 양푼에 아쉽지 않을 만큼 번데기를 먹을 수 있었다. 운학이 누나 운희 언니는 손재주가 좋아 머리를 곧잘 매만졌다. 동네여자아이들은 학교만 파하면 우리집 라일락나무 아래 평상에 모여앉아 틀어 올리고, 후까시 넣고,
묶고, 땋은 머리를 하고 보자기를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미스코리아 놀이를 하곤 했다.
68년 고등동집. 셋째오빠 막내오빠
골목 입구 미용실 하던 은실네의 미색은 빼어났다. 그 집 딸 은실이도 엄마를 닮아 예뻤다. 은실이 아빠는 그 당시 미용사라는 능력 있는 부인을 둔 남정네답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은실네는 가끔 남편에게 머리채를 쥔 채로 동네굿을 보이며 싸우곤 했는데 그렇게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딸 은실이는 피아노를 가르쳤고 내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이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겨울이면 연희네 넓은 마당에서 '진또링(어원을 모르겠다)이라는 전쟁놀이를 했다. 어디서부터 모여 들었는지 동네아이들이 모이면 3-40 명은 금방 넘었다. 적군과 아군 두 편으로 갈라 서로의 군사를 포로로 만들고 적의 진지를 먼저 빼앗는 놀이였는데 남녀구별 없이, 변변한 방한복도 없던 시대에 손등이 터져 가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뛰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놀다가 적군에게 잡힐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바로 담벼락이 붙은 우리 집으로 비겁한 탈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새로운 군대에 편성됐고 우리는 방학이 끝나도록 내내 진또링에 지치지도 않았다.
놀이가 운동이 되고 공부가 되고 친교가 되는, 지금의 아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71년 고등동집. 둘째오빠 큰오빠
고등동집
은실네 가게를 끼고 좁은 고샅으로 들어오면 성기네집, 마당 넓은 연희네 집, 그리고 우리집이 있었다. 우리집은 직사각형의 반듯한 땅 한 가운데에 지어진 일본식 집이었는데 앞뒤로 마당이 넓었고 판자울타리에는 넝쿨장미가 그림같이 얹혔다.
후에 콘크리트판넬로 담벼락을 바꾸고 운치는 사라졌지만. 벽쪽 마당에는 채마밭, 수도, 장독대가 있었고 댓돌에서 대문까지 통로를 빼고는 양 옆으로 온갖 화초가 우거졌다.
작은 방 창문 앞에는 동네 어귀까지 향기를 날리는 라일락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평상이 놓이고, 커다란 개집이 있었는데 개집에는 메리와 그의 후예가 애틋한 가족사와 함께 대를 이으며 살았다. 우리집 개와 고양이는 풀어놓고 키우는 수탉과 서로의 밥그릇 밥을 나누어 먹으며 싸우는 법 없이 어울렸다.
뒷마당에도 닭이 돌아다니며 수채의 밥풀을 쪼았고 명절날 찾아오는 장성한 다섯 오빠들과 일찍 출가한 언니까지 항상 북적북적 식구가 많았다. 지금은 팔순이 다 된 언니는 수원여고를 졸업하고 진흥청엘 다녔는데 월급날이면 막내인 나를 위해 곰보빵을 사들고 오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곰보빵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 됐다.
부엌 밖으로 마르는 법 없는 우물이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우물 청소하는 장정이 두꺼운 로프를 둘러메고 '우물~' 하고 외치면 어머니는 불러 우물청소를 시켰다. 우물 청소는 선녀와 나무꾼에 나올 법한 커다란 나무 두레박을 도르래에 걸어 유난히도 깊은 우리 우물물을 일일이 퍼내고 사람이 들어가 솔질하여 청소하는 일로, 연중 빼놓을 수 없는 행사였다. 어머니는 그런 날은 품삯 말고도 더운 쌀밥을 짓고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삶아 막걸리와 함께 이웃잔치를 벌이곤 했다. 우물은 염분이 많아 식수로는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풍속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즐겼던 것 같다. 내가 디딤돌에 올라 청소가 끝나 막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는 우물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면 메아리 져 돌아오던 정답던 그 울림이 지금도 귓가에 아련하다.
84년 수원역 앞 지하도입구
짝사랑
오랜만에 고등동집을 찾았다. 내 집도 남의 집도 아닌 집 앞에서, 들어가지도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심은 수돗가 은행나무는 그루터기만 남았고 집 밖 공동우물터에 심은 은행나무 한 그루는 나무 나이 지천명을 넘어 동네를 그러안을 듯 넓은 그늘을 지었다. 아버지 나무인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무가, 기르던 반려동물을 낯선 이의 손에 맡긴 것 만큼이나 가슴 한 쪽이 서늘하며 서운했다.
몇 십 년 째 재개발 이름을 달고 사는 폐허 같은 옛집의 옛길을 휘휘 돌아 고향 아닌 내 거처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립다는 말로는 모자라는 고등동집의 기억. 결국은 짝사랑으로 마감할 지나간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이제는 떠나기 위해 다시 내 거처로 돌아간다.
고등동 집에서 돌아가신,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어머니는 꿈에 단 한번 나를 보러 오시곤 오시지 않는다.
김영주
경기도 수원 생. 시인. 운천고등학교 사서.
2009년 <<유심>> 시조 신인상. 2015년 <<푸른동시놀이터>> 동시 신인추천완료. 경기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시집 『미안하다, 달』 『오리야 날아라』 선집 『뉘엿뉘엿』
고등동집
김 영 주
굳이 먼 길 돌아 고등동 집 지나간다
야트막 담장 너머 텃밭 너른 청기와 집
어스름 해질녘이면
창호마다 노을 빛
채송화 맨드라미 뜰 안에 흐드러지고
뒤란 울 밑에는 토끼장 달구어리
우물안 두레박 속엔
구름 한 점 동동
앞마당 가로 질러 빨랫줄이 내달렸지
설 추석 명절이면 섬돌이 분주했어
그 누가 떠메 갔을까
내 유년의 골목길
당신은 뉘시냐며 낯 가리는 문설주
아뜩 깨어나니 나도 내가 낯설어서
들지도 가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
*고등동 - 경기도 수원의 한 행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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