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민들레 압정/ 이문재

꿍이와 엄지검지 2010. 7. 2. 08:55

 

 

 

민들레 압정

 

이문재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 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


                                                <<제국호텔>>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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