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조바심에도 꽃은 피고 또 이울고
- 자본주의의 살풍경, 김영주 근작 시편 -
정용국(시인)
1.
굳이 거창하게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 라는 토인비(Toynbee, Arnold Joseph)의 『역사의 연구』 를 들추지 않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진행되는 모든 현상들은 위의 명제를 실증하는 거취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인류의 역사‘ 는 물론이고 사물의 자취도 다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수(潮水)의 활동에 따라 형성되는 해안의 형태나 그곳에 서식하는 생물체의 변이 과정 등을 살펴보면 경이롭게도 토인비의 주장은 무생물과 생물의 구분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는 경구임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인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병원체와 항체의 경우, 하찮은 들판에서 자라는 잡초들의 성장 과정도 위의 주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이 태어나 유아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활동하고 그 생명을 다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장애와 고난과, 상처와 불화가 기다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은 끝없는 문제를 짊어지고 차마고도와도 같은 아스라한 길을 쉼 없이 넘어가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예술이라는 다양한 장르와 표현기법은 이러한 고통과 애환을 극복하기 위한 ‘파격적인 노출’ 은 아닐까 하는 역설적 방증에 상당 부분을 동의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서 다양하고도 심도 있는 외부와 만나며 고난도의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각색되고 우화(羽化)되며 창작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김영주 시에도 중년여성이 겪고 다스려야 하는 갈등들이 꿈틀대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 야기하는 문제들로 상처받은 직장여성의 마음 갈피를 아스라이 펼쳐내고 있는 모습들도 볼 수도 있다.
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면서 서로 협조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대립하기도 한다. 국가는 항상 공정사회를 지향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을 우리 역사의 수많은 상처들이 증거하고 있다.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동학혁명, 4.19혁명, 제주 4.3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이 모두 사후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그 당사자들에게나 동시대인들이 받았을 정신적 통증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전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피해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심각하다 하겠다. 위에 거론한 커다란 혁명뿐만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흐름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보이지 않는 손만큼 파급 효과가 큰 것이다. 비정규직이 당하는 불공정한 노동과 보수, 직업여성이 느끼는 불합리한 성적 차별, 대기업에 밀려서 ‘을’의 취급을 받는 개인과 중소기업이 안고 가야 할 피해 등 실로 우리는 사회의 품속에서 도저히 빠져 나와서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물론 김영주의 시는 직접적으로 현대인이 체감하는 이러한 불공정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피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시의 근간을 이끌고 있는 기저(基底)는 충분히 그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요동치고 있는 것을 필자는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김영주는 시집 『미안하다, 달』 을 통하여 “삶의 구체 속에서 빛나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담은 그녀의 개성적 음역은, 시조 양식만이 가질 수 있는 고전적 서정과 함께, 삶의 어법에 관한 깊은 사유를 완미한 정형 양식에 담아낸 것이다” 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원고에 담을 근작도 역시 ‘개성적 음역’을 담아냈는데 필자는 다섯 편의 작품을 읽고 난 후 아연 근저가 모호한 비애의 바닷가에 퍼질러 앉아 한 나절을 그 근원에 대한 생각을 추슬러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연유로 시인은 슬픔의 바닷가에서 신음과도 같은 자조의 시를 읊조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곱씹어 보았다. 시 작품을 통하여 ’반드시‘ 작자의 심로를 분석하고 꿰맞추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있다고 보여 진다. 필자는 김영주의 사생활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언어들을 통하여 사유의 근거를 유추하고 상황을 모색해 보는 것도 시를 이해하고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탐험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본다.
사십이 점 일구오 마라톤을 뛰다가
내리막 비탈에서 잠시 숨을 골라본다
무얼까 말로 다 못할
반쯤 남은 물컵 같은
길은 늘 저 만큼쯤 앞서서 달려갔고
가보면 답 있을까 무작정 따랐지만
가다가 아니다 싶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지나온 길목마다
놓았거나 혹은 놓친
내게서 떠난 씨앗 뿌리는 내렸을까
돌부리 무성한 땅에서 숨은 쉬고 있을까
대문 없는 울타리 밑 난쟁이 집채송화
쌀쌀한 바람 앞에 몸을 맡기고 서있다
철지난 옷을 걸치고 길을 나선 여자처럼
- 김영주 「비탈에 서서」 전문 -
‘비탈’ 이라는 단어는 ‘불안하다‘ 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은 이미 균형이 깨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코스 같은 인생길에서 ’비탈‘은 또 하나의 난관이다. 숨을 몰아쉬며 올라 온 오르막을 지나면 내리막은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겠으나 휘청거리는 다리로는 내리막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마라톤의 구간 별 거리와 힘의 분배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뒷심이 모자라 뒤처지거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낭패를 보기 일쑤일 것이다. 김영주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각 수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난다. “반 쯤 남은 물컵 같은” “가보면 답 있을까 무작정 따랐지만” “”네게서 떠난 씨앗 뿌리는 내렸을까“ 이렇게 이어진 노심초사는 관념적으로 흐르다가 마지막 수에 이르러 돌연 ”난쟁이 집채송화“로 모습을 드러낸 불안의 실체는 다시”철지난 옷을 걸치고 길을 나선 여자처럼“이라는 직유의 힘을 빌리며 아슬아슬하게 네 수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네 수의 긴장감과 유기적 긴밀도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시인이 불안해하고 있는 정신의 실체는 무엇일까.
반환점을 돌아 이제 남은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장거리 경기 같은 인생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가다가 아니다 싶어도 되돌릴 수 없는“ 삶이 바로 그것인데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양극체제의 심화와 분배의 불균형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수출 1조 달러 달성이나 세계 10대 교역국이라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 지표와 서민의 삶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맹점이다. 서민의 편이 되기를 거부한 공권력은 재벌 앞에서 날로 약해지고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해 결국 여당 국회의원들이 재벌의 방패막이가 되는 촌극을 빚어내고 있지 않은가. 국가가 막아주지 못한 정치와 경제의 정의는 소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불안을 초래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 현대 사회의 구조인 것이다. 시에 나타난 불안의 요소를 해명하면서 국가와 사회적 시스템을 들먹이는 것은 무리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사회복지가 화두인 시점에서 조망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을 찾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 등 사회적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 처한 서민의 ’불안‘은 가족관계의 붕괴로 확대 재생산 되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나와 우리‘ 곁에서 ”무언가 말로 다 못할“ ”쌀쌀한 바람“으로 불안을 조장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며 김영주 시인도 당연히 그 구성원에 속한 일개 시민으로서 느끼는 불안감의 함축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얼굴, 얼굴 하면 억울한 굴레같다
굳이 묻지 않아도 골골이 드러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너는 분명
내 얼굴
거울 앞에 앉아서
내 얼굴 앞에 앉아서
한 번도 날 위해선 웃어주지 않는다고
어느 날
얼굴이 문득
얼굴에게 묻고 있다
- 김영주 「얼굴」 전문 -
「얼굴」도 앞서 살펴 본 「비탈에 서서」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는데 ‘얼이 드나드는 굴‘이라는 얼굴을 “억울한 굴레같다”로 대입하는 시인의 심저에는 50대 중년의 고뇌와 결핍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누구나 일상의 분주함을 떠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볼 때 자신의 누추함과 세월의 진이 묻어나는 자신의 얼굴에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표현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단어는 바로 앞에서 살펴본 소시민이 느끼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진한 ’반감‘이 묻어난다. 억울하다는 느낌의 배후에는 이 사회가 공평하지 않다는 심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날 위해선 웃어주지 않는” 얼굴에 대해 시인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는 강력하다 하겠다.
2.
「여흔」은 목소리로 보아 한 여성이 흠모하는 이성에 대해 느끼는 간절하고도 애틋한 사랑의 말투가 강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마치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이 풍기는 진한 여성적 취향을 전하고 있는데 만해의 시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행인’을 ‘식민지 치하의 조국’ 이었다는 일반적 해석을 차치(且置)하고 본다면 그 흐름과 기류가 많은 부분 이 상통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대 쓰다듬고 지나간 자리마다
해조음 나지막한 손때 곱게 묻었네요
내 한숨 다독이고 간 그대 말간 손이네요
그대가 새겨놓고 그대가 지우네요
든 자리는 꽃자리요
난 자리는 눈물자리
굽이쳐 돌고 또 돌아 다시 바다로 드는군요
몰아치고 내치던 한 생의 회오리가
꿈처럼 헛말처럼 켜켜이 쌓입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마
돌아보도 않네요
그래요 내 탓이에요 모두가 내 탓입니다
웃으며 보내지요
돌아서서 젖겠지만
그래도 용서하시고 다시 내게로 올 거지요
- 김영주 「여흔(餘痕)」전문 -
당신은 흙발로 / 나를 짓밟습니다. / 나는 당신을 안고 / 물을 건너갑니다. /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 밤에서 낮까지 /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 오실 줄만은 알아요 /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 부분 -
이렇게 비교해서 읽어 보면 바닷물은 무정하게 왔다 가는 ‘행인’ 이고 바닷가 모래밭은 늘 님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나룻배’와 같은 존재이다. 김영주 시인이 만해의 작품을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나룻배와 행인」을 유념하고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독백이 담담하고 고즈넉하게 흐르고 상대방에게 존칭을 쓰고 있다는 점도 같다. 또한 작품을 중의적으로 분석할 때 만해가 ‘식민지 조국’을 숨겨 두었다면 김영주는 ‘사회적 약자의 상처’를 숨겨 두었다 할 수도 있겠다. “난 자리는 눈물자리” “한 생의 회오리가 / 꿈처럼 헛말처럼 켜켜이 쌓입니다” 라는 독백은 야속한 상대방에게 던지는 회한이다. 약자인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고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와 직장에 대한 반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흙발로 짓밟고 돌아보지도 않는 행인에게, “다시는 오지 않으마” 억설을 퍼붓는 이에게 참고 참아 가며 내보이는 마음의 갈피이다.
직장은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지급하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직장은 개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압박하기도 한다. 합법적으로 규정된 파업도 ‘불법 파업’으로 내몰리는 것이 다반사고 강성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에는 종북주의라는 해괴한 논리를 갖다 붙이거나 조합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견도 심화되었다고 보여 진다. 수구세력들이 집권하면서 그나마 구축되었던 알량한 사회 안전장치와 약자 보호 조항들이 묵살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요 내 탓이예요 모두가 내 탓입니다” 라고 말하며 “돌아서서 젖겠지만” “웃으며 보내“ 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다그치는 불공정한 자본주의에 답하는 우리 시대의 살풍경일 수도 있다는 것이 「여흔」을 읽는 필자의 시각이다. 끝으로 작품에 더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네 수에 이르는 작품의 길이가 꼭 필요한 것이었느냐에 관한 것이다. 연시조는 단시조의 배열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고난도의 힘과 치밀한 조직이 필요하다. 연시조의 길이는 고집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압축미와 균형을 깨며 길이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숨겨 놓고 찾아서 느끼게 하는 것이 시조에서는 더 중요하다.
3.
당신은 발을 걷고 징검돌을 놓습니다
내 발이 젖을까봐 징검돌을 놓습니다
가슴 속 뜨거운 섬을
뚝뚝 뜯어 놓습니다
당신을 따라가며 나도 돌을 놓습니다
가까이 갈 수 없어
멀리도 갈 수 없어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돌을 묻어 놓습니다
물을 다 건너오니
나는 여기
당신은 거기
당신과 나 사이의 저 물길을 어쩌나요
누 억 년 그리고 그려도
닿지 못할
그대
나
* 西浦의 유배지
- 김영주 「당신은 아직도 그 섬에 계십니까 - 노도에서」 전문 -
시에 부제나 각주가 붙을 경우 시는 갑자기 방향이 바뀌거나 한정된 특정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위 시의 경우는 두 가지가 다 붙어 있는 경우여서 더욱 그렇다. ‘노도에서’ 만 붙어 있다면 모르겠는데 ‘서포의 유배지’라는 설명이 더해지니 시의 폭은 대단히 좁은 한계상황으로 몰린다. 그렇다면 노도에서의 감흥이 김만중이라는 조선 중기 인물에게까지 닿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실상 시는 그런 특별한 감흥이 적다. 서포라는 인물은 명문가에 태어나 서인세력의 한계를 지니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한글 소설을 썼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것도 목적이 분명한 의도를 가진 소설이었지만 출중한 구성력과 ‘소설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작품성이 인정된다는 점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이 점에 주목한다면 시를 조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듯하지만 아직 막연하다. 서인세력이 그러했듯이 서포도 정쟁에 내몰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말년을 노도라는 남해의 섬에서 지내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포만필」 보다 시인에게는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데 그것이 문학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아도 시의 분위기는 잡힐 듯 말 듯하다. ‘서포의 유배지’라는 각주가 없었다면 굳이 서포를 생각하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아무튼 유배지에 놓인 서포가 시 속의 ‘당신‘ 일 가능성은 높지만 ’나‘와의 관계는 모호하다. 존경 받을만한 소설가로서의 김만중을 생각하면 시가 조금 풀리지만 부제와 각주를 생략하고 제목을 그냥 ‘섬’ 정도로 붙였으면 오히려 시의 함의와 풍부한 상상력을 더 유발 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가슴 속 뜨거운 섬을 / 뚝뚝 뜯어 놓습니다” 와 “누 억 년 그리고 그려도 / 닿지 못할 / 그대 / 나” 같은 좋은 구절도 강력한 주제가 이끌고 가는 흐름이 없어서 서로 분위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그저 따로 제각기 뒹굴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것 같겠지만
가다보면
고이다보면
입술 지긋 깨물게 돼
윗물이
아랫물 되고
아랫물이
윗물 되고
- 김영주 「물은」 전문 -
시의 가장 큰 적인 ‘설명’ 때문에 시가 약해졌다. 제목의 주격조사와 초장은 그 대표로 야단을 맞아야 할 경우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리게 하는 「물은」 이미 시로서는 약하디 약한 존재가 아닌가. 쉽고 지극히 보편적인 주제와 소재를 드러내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윗물이 / 아랫물 되고 / 아랫물이 / 윗물 되고”라는 진리를 어떻게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밀어 올릴 수 있겠는가를 고민했는데 너무 큰 주제를 너무 평범하게 썼다.
4.
마지막에 쉽지 않은 말을 붙였는데 산문을 써야하는 필자의 가장 큰 고역이다. 서평이나 해설은 좋은 작품만을 골라 쓸 수 있지만 신작특집에서는 어느 작품이라도 죽비를 피해 갈 수 없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아마 김영주 시인이 평생 들어야 할 고언을 이번 기회에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김영주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의 문제는 그가 잘 딛고 넘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신작에 담긴 내용들은 너무 무겁고 신산한 것들이 많았다. 사람 사는 곳을 고해(苦海)라 하지 않는가. 언덕을 넘으면 평평한 길이 잠시라도 이어질 것이니 들메끈을 고쳐 매고 마음을 다잡아 나가길 바란다. 김영주가 시에서 보여 준 사회성 짙은 문제들은 그가 스스로 이기고 넘어가야 할 자신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조바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은 피고 또 이우는 봄날과도 같이 시인 김영주가 마음에 짊어진 무겁고 애틋한 ‘조바심‘을 잘 다스려서 환하고 튼실해질 것을 믿는다.
정용국 : 경기 양주 생. 2001년 계간 『시조세계』로 등단. 이호우,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명왕성은 있다』외.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처장.
<<시조시학>> 2013년 여름호
'♡♡♡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 / 이정환 (0) | 2013.07.14 |
---|---|
[특집] 시조시학 2013 여름호 (0) | 2013.06.27 |
[스크랩] (평론) 저자의 뒷골목에서 광장을 꿈꾸는 어릿광대 / 정용국 (0) | 2013.06.27 |
[스크랩] 시조문학 작가에게 묻은 나의 체험적 질문 (0) | 2013.06.27 |
[스크랩] (평론) 맨발의 詩眼이 밀어 올리는 畏敬의 시 (0) | 201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