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흔(餘痕)
김영주
그대 쓰다듬고 지나간 자리마다
해조음 나지막한 손때 곱게 묻었네요
내 한숨 다독이고 간 그대 말간 손이네요
그대가 새겨놓고 그대가 지우네요
든 자리는 꽃자리요
난 자리는 눈물자리
굽이쳐 돌고 또 돌아 다시 바다로 드는군요
몰아치고 내치던 한 생의 회오리가
꿈처럼 헛말처럼 켜켜이 쌓입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마
돌아보도 않네요
그래요 내 탓이에요 모두가 내 탓입니다
웃으며 보내지요
돌아서서 젖겠지만
그래도 용서하시고 다시 내게로 올 거지요
당신은 아직도 그 섬에 계십니까
- 노도*에서
김영주
당신은 발을 걷고 징검돌을 놓습니다
내 발이 젖을까봐 징검돌을 놓습니다
가슴 속 뜨거운 섬을
뚝뚝 뜯어 놓습니다
당신을 따라가며 나도 돌을 놓습니다
가까이 갈 수 없어
멀리도 갈 수 없어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돌을 묻어 놓습니다
물을 다 건너오니
나는 여기
당신은 거기
당신과 나 사이의 저 물길을 어쩌나요
누 억 년 그리고 그려도
닿지 못할
그대
나
* 西浦의 유배지
물은
김영주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것 같겠지만
가다보면
고이다보면
입술 지긋 깨물게 돼
윗물이
아랫물 되고
아랫물이
윗물 되고
얼굴
김영주
얼굴, 얼굴 하면 억울한 굴레같다
굳이 묻지 않아도 골골이 드러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너는 분명
내 얼굴
거울 앞에 앉아서
내 얼굴 앞에 앉아서
한 번도 날 위해선 웃어주지 않는다고
어느 날
얼굴이 문득
얼굴에게 묻고 있다
비탈에 서서
김영주
사십이 점 일구오 마라톤을 뛰다가
내리막 비탈에서 잠시 숨을 골라본다
무얼까 말로 다 못할
반쯤 남은 물컵 같은
길은 늘 저 만큼쯤 앞서서 달려갔고
가보면 답 있을까 무작정 따랐지만
가다가 아니다 싶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지나온 길목마다
놓았거나 혹은 놓친
내게서 떠난 씨앗 뿌리는 내렸을까
돌부리 무성한 땅에서 숨은 쉬고 있을까
대문 없는 울타리 밑 외따로 핀 도라지꽃
쌀쌀한 바람 앞에 몸을 맡기고 서있다
철지난 옷을 걸치고 길을 나선 여자처럼
<시인의 산문>
안단테 안단테
김영주
1.
아마도 그 무렵이지 싶다. 내가 글을 쓸 용기를 감히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된 시점이. 지방의 대학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젊음 하나만으로도 대접을 받던 아름다운 20대. 휴일 아침이면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피향과 함께 자취방 창문을 넘나들며 이웃방 복학생들에게 본의 아닌 추파로 던져지던 시절, 때때로 느닷없이 덤벼드는 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기도 많이 하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도현 씨가 학생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등단한 소식을 듣는다. 그 일은 소도시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는 충격적 사건이어서 헛바람 잔뜩 들어간 나를 꿈 깨게 하기에 충분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등단이라는 먼 여정 앞에서 부끄러운 습작노트를 라면 박스에 쓸어 담고 스카치테이프로 미련 없이 봉해버리고 만다. 이름 앞에 '문학소녀'라는 수식어를 무슨 장신구처럼 매달고 그렇게 진진하게 끌고 가던 쓰기를 하루아침, 단칼에 접어버린 것이다.
2.
작년 봄, 살던 집 조그만 텃밭에 고추 모, 옥수수 모, 호박 모 몇 개를 사다 심었다. 호박은 줄기도 잘 뻗고 꽃도 많이 맺히는 것 같더니 달리는 꽃마다 툭툭 떨어진다. 그래도 고추와 옥수수는 열매 몇 개를 매달아 면피는 했다. 만약에 벌레라도 생겼다면 나도 어머니처럼 조심스레 잎을 따주었을까. 에프킬라만 흥건히 뿌려대지는 않았을까.
서정주 시인은 '마흔 다섯은 귀신이 옆에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라 했다. 불혹을 지나 더더욱 의혹의 경계가 없는 관조하는 나이가 되겠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까. 어른이 되면, 나이가 들면, 지혜와 어짊은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는데 노염만 는다.
3.
나는 가끔 <시조(時調)>라는 명칭이 얼마나 과학적인가에 혼자 놀라곤 한다. 때 시(時)자를 쓰니 굳이 '현대'라 말하지 않아도 시조는 언제 어느 시대에나 현대시조다. 아니, 현대시조여야 한다. 백 년 전에는 그 시대가 현대였을 것이고 오늘은 오늘의 시대에 맞는 노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는 늘, 항상, 언제나 뒤쳐져서는 안 되는 도전정신과 긴장감을 안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시조는 '3행'의 정형시가 아니라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시다. 나는 이 우주의 원리가 들어있는 '흐르고, 엮고, 추이고, 푸는(流曲節解)' 시조의 기승전결이 즐겁다. 말이 어눌한 나는 행과 행 사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에 여백을 두어 말하기도 할 것이고 특히 구와 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을 매우 경계할 것이다. 자유로운 시상의 전개를 위해 행갈이에도 유연성을 둘 것이다.
4.
시조를 쓰고부터 버리지 못해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던 버릇이 없어졌다. 정형이라는 틀 안에서 안온하다. 내가 걸친 시조라는 옷이 자연스럽게 몸에 붙어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는'*다면.
* 조운의 '고매(古梅)'에서
<약력>
1959년 경기도 수원 생. 2009년 <<유심>>으로 등단.
2012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미안하다,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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