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 / 이정환

꿍이와 엄지검지 2013. 7. 14. 14:06

 

<2013 대구시조시인협회 만해축전 학술세미나>

- 인문학과 현대시조 -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

 

이정환(대구시조시인협회장)

1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 즉 인간의 가치 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한 갈래인 시조는 지금까지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부단한 탐구에 힘써왔으므로 인문학과 시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존립하고 진화․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터다. 다만 그간 일각에서 시조에 대한 비판으로 지나치게 자연에 경도된 음풍농월을 지적한 바 있었지만, 근래에 생산된 적잖은 시조 작품들은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그야말로 인간사에 대한 주도면밀한 탐구와 천착에 힘쓰고 있는 쪽으로 다채로워지고 있다.

이 글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사에 대해 밀도 높게 육화하고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논의를 펼쳐나가고자 한다. 그 주안점은 제목으로 삼은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에 관한 것이 되겠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것은 불변의 가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새로움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낯익은 것이 되어 그 빛이 바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빛바램을 초월할 수 있는 독창성을 담보한다면 만구성비로 남게 될 것이다.

 

2

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한번도 먹어 보지 못한 새로움이 있다면 흥미를 가지고 그 음식 앞에 기쁘게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들은 날마다 양산되어 우리 앞에 무수히 놓이지만 ‘새로움’이라는 성찬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시인이 새롭다 고 내놓아도 식성이 까다로운 독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가 적잖다. 그런 까닭에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은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라는 허허벌판에 늘 내던져져 있는 가련한 존재이기도 하다.

한 편의 작품이 유일무이한 독창성으로 면면히 그 생명력을 이어간다면 그보다 더 바랄 바가 없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 말 되어진 적이 없었고, 말 되어질 수 없었던 은밀한 출생신화로 채워진 작품 같은 것이다. 기실 이러한 점을 시조에게 요구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일정한 틀의 규제를 받는 시의 갈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 없다. 정형의 틀 안에서 자유로운 변주가 가능하므로 다채로운 실험과 시도로 ‘은밀한 출생신화’의 탄생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개안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진면목을 읽게 된다.

 

아아, 있었구나 늬가 거기 있었구나

있어도 없는 듯이 그러능게 아니여

내 너를 잊었던 건 아니여 결코 아니여

 

정말 거짓말 아니여 정말

해쓱한 널 내가 차마 잊을까

뉘 있어 맘 터억 놓고 나만 돌아서겠니

 

암, 다아 알고 있어 늬 맘

행여 눈물 비칠까 도사리는 안인 거

울면서 씨익 웃음 짓는 늬 심정 다 알아 나

 

정말이여 나, 나 설운 게 아니여 정말

조각난 늬 아픈 델 가린다고 모를까

이렇게 흐느끼는 건 설워서가 아니여

-류제하,「낮달」전문’

 

구어체로 시를 풀어가고 있다. 우리말의 결 고운 아름다움이 전편에 넘쳐난다. 역설적이다. ‘낮달’이라는 비근한 시적 대상을 이렇게 실감나게 형상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효과적인 독백체, 말 못할 긴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낮달’은 인생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서로의 아픈 데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며 살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그리 길지 않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가령 화폭에다 산 하나를 담는다 할 때

그 뉘도 모든 것을 다 옮길 순 없다

이것은 턱없이 작고 저는 너무 크므로.

 

그러나 그렇더라도 요량 있는 화가라면

필경은 어렵잖이 한 법을 떠올리리

고삐에 우람한 황소 이끌리는 그런 이치!

 

하여 몇 개의 선, 얼마간의 여백으로도

살아 숨 쉬는 산 홀연히 옮겨 오고

물소리, 솔바람 소리는 덤으로 얹혀서 온다.

-조동화,「‘시론」전문

 

세 수의 시조로 쓴 詩論이다. 시 쓰는 일을 그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첫 수에서 화폭에 산을 담을 때 재구성을, 둘째 수에서는 요량 있는 화가로서 한 법 즉 ‘고삐에 우람한 황소 이끌리는 그런 이치’를 터득해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몇 개의 선과 얼마간의 여백으로도 산을 숨 쉬게 하고, 덤으로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를 얻는다. 시조로 쓴 시론이지만, 확장해서 생각하면 이것은 곧 인생론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 삶인 지를 은연중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름 깝치는 날 운주사 찾아가면

금 가고 으깨어진 삶을 끌어안은

알 듯한

얼굴 모습

닳아 눈물겨웁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않은 눈 코 귀 입

그래도 너그러움 잃지 않고 지니고 선

운주사

석불 앞에서

마주 한 몸 저리다

-조영일,「‘운주사」전문

 

극도로 언어를 절제한다. 간결한 묘사에 경도되어 있다. 운주사 석불의 얼굴 모습을 두고 ‘금 가고 으깨어진 삶을 끌어안은’이라고 형용한다. 흡사 세상을 살만큼 산 한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성하지는 못하지만 너그러움 잃지 않고 있는 석불 앞에 서니 자신의 몸이 별안간 저려온다고 토로한다. 몸이 저린 것은 갖은 풍상을 겪은 석불과 비견되지 못할 자신의 삶을 문득 생각하다가 불시에 일어난 반응일 것이다. 석불의 너그러움에서 우리는 결국 삶의 참된 뜻을 오래 반추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서 인생의 뜻을 발견하는 일은 이렇듯 귀한 것이다.

 

부처님 출타 중인 빈 산사 대웅전 처마

 

물 없는 허공에서 시간의 파도를 타는

 

저 눈 큰 청동물고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뼈는 발라 산에 주고 비늘은 강에나 바쳐

 

하늘의 소리 찾아 홀로 떠난 그대 만행,

 

매화꽃 이울 때마다 경을 잠시 덮는다

 

혓바닥 날름거리며 등지느러미도 흔들면서

 

상류로, 적요의 상류로 헤엄쳐 가고 나면

 

끝없이 낯선 길 하나 희미하게 남는다

-민병도,「풍경」전문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서 삶의 의미를 천착하여 보여준다. 물 없는 허공에서 시간의 파도를 타는 청동물고기,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산에는 뼈를 발라서 주고 강에는 비늘을 바치고, 하늘의 소리를 찾아 만행 길에 오른다. 적요의 상류에 무엇이 과연 기다리고 있을까. 끝없이 낯선 길 하나 희미하게 남는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또다시 저벅저벅 걸어가야 할 것이다. 과정 그 자체에서 이미 삶의 참된 의미가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느 날 그대 향한 바람이고 싶어라

 

울 넘어 물 넘어

뫼라도 불어 넘어

 

그 가슴

들이받고는

뼈 부러질 그런 바람.

-문무학,「바람」전문

 

초장은 평범한 진술이다. 그러나 중장에 와서 네 번이나 쓰인 ‘어’와 ‘울, 물, 불’과 같은 ‘ㄹ’ 받침의 말이 곳곳에 놓여 서로 부딪치면서 묘한 탄력과 파장을 일으킨다. ‘그대 향한 바람이고 싶은’ 일념 때문에 울도 넘고 물도 넘으며, 뫼라도 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할 터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가슴 들이받고는 뼈 부러질 그런 바람’이고자 간절히 소원한다. 서서히 붙은 탄력이 마무리 단계인 종장에 와서 뜻밖의 반전을 통해 작은 충격을 안겨준 셈이다.

「바람」은 상처 없는 사랑을 이 땅 어디에서 찾을 수 없음을 다시금 환기하게 한다.

 

살에 밴

선지빛마저

다 헹군 물결 위에

 

두레박

줄 끊어져

꽃으로 떨고 있고

 

조그만

하늘 하나가

따로 내려 앉는다.

-노중석,「수련」전문

 

어떤 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언어가 가진 한계와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다 헤아릴 수 없듯이. 때로는 말의 재미를 때로는 신선한 메시지나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읽는 것 자체가 적잖은 기쁨일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수련’은 참신하다. 언뜻 한 설화를 떠올리게 하는 ‘두레박 줄 끊어져’와 ‘조그만 하늘 하나가 따로 내려 앉는’ 등은 쉽사리 해석되지 않는다. 애매한 언어 장치에서 다채로운 상상을 하게 된다. 특히 종장 결구에 놓인 ‘따로’라는 낱말이 미묘하게 읽힌다. ‘수련’에서 소우주의 미학을 본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 대청마루를 건너가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

아마 다시 재나보다

-이종문「봄날도 환한 봄날」전문

 

봄날도 환한 봄날 호연정 대청마루에서 한 마리 자벌레를 본 것은 우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칠 법한 광경도 때로 시인의 눈길에 포착되면 섬세한 육화 과정 즉 ‘자벌레 한 마리의 우주 시학’을 이룩해낸다. 모래 한 알 속에서 삼라만상을 읽는 일과 진배없는 일이다. 자질하다 돌아오는 모습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아마 다시 재나보다’라고 혼잣말처럼 툭 내뱉는 뜻밖의 결구는 웃음을 절로 머금게 한다. 번뜩이는 재치다. 수월하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가 않고, 되풀이되는 부분이 잦음에도 말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언어로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갈밭 개똥밭에는 쑥이 참 잘도 크는데요

빈손에 쑥대머리라고 핀잔만 주는데요

돌절구 쑥물 한 대접 오장이 다 편한데요

내 새끼 쑥쑥 자라 돈 많이 벌면요

날마다 쑥설쑥설 쑥덕공론 천지라도요

쑥대가 왕대보담도 못할 게 뭐 있나요

저 양반 쑥스러워 내 눈을 외면해도요

왕년에 쑥버무리 안 먹고 큰 놈 있나요

자줏빛 쑥부쟁이꽃 첫사랑도 숨겼지요

부황 든 도시마다 쑥대밭이 됐지만요

팔 뻗고 허공으로 쑥떡 한 개 먹이고요

등창 난 세상 물어서 쑥뜸질을 놓습니다요

-최영효,「쑥」전문

 

열두 행 끝이 모두 ‘요’로 끝맺고 있다. ‘요’는 다소 가벼운 종결어미이므로 다분히 의도적이다. 제목까지 포함해서 ‘쑥’이라는 말이 열여섯 번이나 나온다. 이 점 역시 의도적이다. 네 수를 한 연으로 한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쑥을 통해 삶의 지향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어려운 데가 없고 그대로 읽히며, 되풀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자연 회복 의지 혹은 끈끈한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특히 마지막 수에 와서 잘 승화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이 시편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정형 안에서 이와 같은 실험은 매우 뜻 깊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손톱 밑에

눈곱만한 가시 하나 박혀도

두 눈을 부릅뜨고 바짝 바짝 들이댔다

매사에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곤 했었다

 

실눈 뜨고

멀리 봐야 잘 뵈는 요즘에서야

내 몸이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읽을 때라고

-유해자,「내 몸이 말을 한다」전문

 

연치의 깊이에서 오는 자각을 노래하고 있다. 피 끓는 젊은 시절엔 사소한 일에도 잘 참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덧 나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떠야 먼 곳이 잘 보이게 되자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읽을 때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것은 웬만큼 나이든 몸이 자신에게 넌지시 일러주는 말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내 몸이 말을 한다’를 제목으로 삼고, 둘째 연에서 ‘내 몸이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라고 풀어 표현한 것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완도 끝 밤 바닷가, 자갈 쓸리는 소리 듣는다

차라리… 차라리… 끝없이 되뇌이는

내 귀엔 그렇게 들린다, 모서리가 다 닳아 버린

 

차라리 잊어버리자 차라리 떠나버리자

검게 물들어 가슴 쓸리는 물살들

수없이 다짐했지만 떠나지 못한 그 자리에…

-송정란,「정도리에서」전문

 

정도리는 완도 서쪽 끝 바닷가인데 갯돌 해변이다. 어느 날 밤 파도가 칠 때마다 모서리가 다 닳아 버린 자갈 쓸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차라리… 차라리…’란 말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잊자, 떠나버리자’라고 수도 없이 되뇌곤 하지만 어디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떠나지 못한 그 자리에서 듣는 자갈 쓸리는 소리는 유별난 감회에 젖게 한다.「정도리에서」는 인생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에 살아 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환기하게 한다.

 

머리 하얀 할머니와 머리 하얀 아들이

앙상하게 마른 손을 놓칠까 꼬옥 잡고

소풍 온 아이들처럼 전동차에 오릅니다

 

머리 하얀 할머니 경로석에 앉더니

머리 하얀 아들 손을 살포시 당기면서

옆자리 비어 있다고

여 앉아 앉아

합니다

 

함께 늙어 가는 건 부부만은 아닌 듯

잇몸뿐인 어머니도

눈 어두운 아들도

오래된 길동무처럼

뉘엿뉘엿

갑니다

-김영주,「뉘엿뉘엿」전문

 

김영주의「뉘엿뉘엿」은 특이한 정경을 제시하고 있고, 이미 제목「뉘엿뉘엿」이 주는 울림만으로도 정서적으로 깊은 호소력을 안긴다. 해가 질 무렵의 모습을 두고 흔히 쓰는 효과적인 의태어인 ‘뉘엿뉘엿’이 이 시조의 정황과 깊이 맞물려서 미묘한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시 속의 모자는 손을 서로 꼭 잡고서는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젊어서도 이렇게 손을 잡고 다니기 힘든데 머리 하얀 늙은 아들이 어머니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으라며 아들을 부르는 것은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이 장면은 ‘어머니’로서의 끝없는 자식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듯싶다. ‘잇몸뿐인’ 어머니와 ‘눈 어두운’ 아들이라는 무언가 부족하고 완벽하지 못하다는 의미의 수식어를 통해서 오히려 서로의 사랑으로 그 부족함을 채운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전달 받는다. 또 마치 부부처럼 함께 늙어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과 그것을 표현하는 ‘뉘엿뉘엿’이라는 단어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을 감상하는 듯하다. 2)

 

 

같이 늙은 모자간을 보니 아름답기도 하고 그만큼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낀다. ‘오래된 길동무’처럼 이라는 구절에서 모자간에 서로를 의지하는 장면이 연상되어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결혼한 가정에서 같이 늙어가는 부모님과 서로 의지하며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 자체가 마치 어느 모자의 삶의 일부분을 떼어다 적어놓은 것 같아 좋다. 또 시 제목을 보고 해가 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표현한 것인 줄 알았는데 늙은 만큼 느려진 몸이 천천히 가는 느낌도 들고 뉘엿뉘엿 지는 즉 같이 늙어가는 모자를 표현한 것도 같아 신선했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고 이가 없는 할머니를 단순히 그만큼 늙었다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들이 머리가 하얘지고 눈이 어두워지기까지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3)

 

「뉘엿뉘엿」에 대한 두 편의 감상은 따뜻한 가족애 혹은 인간애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러한 정경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쉬이 놓쳐버리게 된다. 흡사 순간포착과 같은 혜안으로 세 수 한 편에 말로 다 못할 애환이 내재된 인간사를 시종일관 잔잔한 어조로 육화하여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을 넉넉히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3

인간사에 대한 시편들도 결국 자연과 연계 짓지 않고서는 노래될 수 없음을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의 주안점이 된 ‘새로움과의 끝없는 쟁투’는 창작을 일삼는 시인들이 늘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다.

독창적이면서도 생명력 있는 역동적인 작품은 독자의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조는 정형의 틀을 지니고 있는 만큼 다채로운 변화와 창의적인 육화 과정이 부단히 요구되고, 틀을 유지하되 틀에 매이지 않는 실험을 한 편 한 편마다 담아내는 끝없는 번뇌의 공정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때의 새로움이 곧 낯익은 어떤 것이 되지 않고 길이 남을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결정체로 대상을 형상화해야 하는 지 숙고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시인이 지불해야할 산고의 몫이다. 독자가 금방 식상해 버리는 새로움은 새로움이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 과연 새로운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길이 남을 새로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이 글에서 논의한 작품들과 더불어 끝없이 고민해야할 화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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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느 일반 독자에게 텍스트를 제시한 뒤 나온 반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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