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겹 / 김경미

꿍이와 엄지검지 2009. 12. 20. 08:55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고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김경미, 「겹」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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