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조, 중흥기일까 위기일까
김영주
오늘날의 현대시조를 시조의 중흥기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는데 과연 오늘의 시조는 중흥기일까 위기일까. 중흥기라면, 혹은 위기라면, 시조의 내일을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시조에 입문한 지 이제 5년, 감히 이런 중대한 고민 앞에 설 수 있을지를 염려하며 창작자 입장에서 평소 갖고 있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조인구의 증가로 인한 양적 변화는 그간의 시조시인들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기존의 낡은 이미지에서 탈피,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자기만의 이름표를 달기 위한 개성적 시각의 전개 등은 커다란 발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형식적 면에서도 시루떡처럼 네모반듯한 외형에서 좀더 심미적인 글자배열로 행갈이의 융통성이 보편화됐고, 자음 또는 모음만으로 소리와 태를 묘사한다든가 문자배열을 형상화하여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기법 등은 아주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장순하 선생님의 댓돌 위에 놓여진 ‘고무신’도 처음에는 외면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을 디지털시대에 발맞춰 한 발 더 내딛는 시도라고 보아준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고, 아이러닉하게도 같은 내용이 우리 고유의 시조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보는 시각이라면 오늘날의 시조는 당연히 우려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시조의 변화를 꾀하고 우수성을 논해도 대중의 태반은 시조를 잘 알지 못하고 또한, 그냥 많고 많은 시 중에 우연히 만난 그 좋은 ‘시’가 아, 시조였구나 하는 정도로만 시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시조가 구태의연한 옛 정서라는 편견으로 인해 ‘시조’라는 이름만으로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조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요, 콤플렉스라 아니할 수 없다.
학교에서의 시조 교육
시조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여러 차례 냈지만 일선 교사의 시조교육은 아직까지 변화가 없어 보인다. 아니, 아직 그럴 계기도 없었다.
국어교육 현장에서 시조를 가르치는 교사의 말을 들어보면,
“현재 1학년은 현대 시조의 소재, 표현, 주제의 다양성에 대해 고전시조와 비교하며 가르친다. 2학년은 고전 시가의 고어 표현을 해석하는데 급급하고, 3학년은 문제풀이를 주로 하다 보니 빈도수 높은 고어와 관습적 표현을 주로 알려주고 익히게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이들이 정형시에 대한 이해조차 낮다.
시조의 압축적인 형식미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데 그 일이 매우 어렵고, 특히 수능이 생긴 이후 학생들은 시험 점수 올리기에 바쁘고, 탐구형 문제가 출제 되다 보니 시조에 대한 이해도는 더욱 낮아 향가, 고려속요, 경기체가, 가사 등 모든 고전 운문은 다 시조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아무리 ‘현대’시조를 강조해도 그저 다만 ‘시조’로 이해할 뿐, 고대시조와 구분해서 이해하지 못하는데, 1학년 교과서의 경우에는 현대시조 한 편만 달랑 실어놓고 고시조와의 차이점을 알게 하는 학습 활동이, 가르치면서도 너무 우스웠다. 아무래도 수능 출제 비율이 높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가감 없는 우리의 고등학교 국어시간, 시조교육의 현장이다. 더 많은 작품을 실어야한다는 우리의 목소리와 달리 시조를 요구하지도 않는 현실,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하고 무엇에 주력해야하는지 충분한 답이 될 듯싶다.
순수 독자층의 확보
시조는 다른 장르의 문학과 비교해볼 때 순수 독자층이 너무 얇다. 창작자가 곧 독자가 되는 자급자족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조도 순수 독자와 만나는 방법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그러려면 시조 전문지만을 고수할 게 아니라 다른 문학 장르를 수용한 종합문예지 형태로 자연스럽게 이웃의 독자층을 유인하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한다.
유통구조
시집을 내고 시조 시인들끼리 나누어 보는 패턴에서도 벗어나야겠다.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도 원고료를 못 받는 출판구조’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낸 적이 있다. 원고료는 못 받을망정 책값(자비 출판)에 우송료까지 지불해야하는 현실은 너무 서글프다. 책을 내는 회원에게 편당 천 원이라도, 원고료 정도는 보장하는 복지시스템이 아쉽다. 시집을 사서 보아야한다는 말에 수긍은 하나, 그 말의 책임 또한 누구도 질 수 없는 일이다. 내놓기가 무섭게 절판인 작가도 있겠지만 판로를 걱정해야하는 작가에게는 무료로 나누어주는 일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일 테니 말이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 되는 식이더라도 구조를 개선해야할 일이다. 출판계의 관행이나 불황만을 탓하다가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시조를 자유시와 비교하지 말자
흔히 시조의 우수성을 논할 때 습관적으로 자유시와 비교하는데 제발 그러지 말자. 자유시는 정형시에 대비되는 개념일 뿐이다. 굳이 자유시와 견주어서 ‘우리시’가 어떻다고 우수성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공연한 열등감으로 비친다. 그냥 독자적으로 시조의 우수성을 펼치는 편이 시조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비교하고 경쟁력을 갖추어야할 부분은 자유시에서 다루는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자연물과 옛것에 대한 향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애상에 집착하는 것 등이 시조의 대표적 정서로 인식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책, 재미있어야 읽는다. 시조, 재미있어야 읽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읽도록 이야기 한 편, 이미지 한 장이 그려지지 않는 오로지 형식에만 충실할 뿐인 시조집, 이미지의 변환에는 성공했으나 정형에 집어넣지 못해 특히 구와 구의 경계를 무시하고 두루뭉술 형식에 너그러워지는 일등은 시조인으로서 호환 마마만큼 경계해야할 일이다. 또한 자유시인이 시조 쓰는 일을 큰 소득인 양 여기는 풍토도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자
시조의 시는 때 시(時)자를 쓴다. 자연을 관조하고 인생의 낭만을 노래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겠지만 시조를 쓰는 사람은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일원으로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고 불의 에 맞설 줄 알며 약자를 대변해 저항해줄 줄 알아야겠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정치? 종교? 지도자의 힘? 문화다. 언 땅을 뚫고 고개 내미는 여리디 여린 풀잎 같은, 문화 예술의 힘에서 나온다. 더군다나 시조인은 그 시(時)대를 노래(調)하는 사람들이다. 아름답고 고운 것만이 노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세상은 곱지만도 아름답지만도 않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우리 시조시인들은 무엇을 했었나 하는 반성의 소리를 고해성사처럼 토해내지만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면죄가 되지 않는다. 시대가 처한 현실을 외면한다면 문학인으로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시조 평론가들은 많이 읽어 주고 정의로운 칼날을 휘둘러 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시인의 같은 작품이 반복적으로 읽히는 사례가 많고 대부분의 작품은 한번 읽힐까 말까 한 게 시조단의 현실이다. 그나마 간택된 작품은 생애 단 한 번의 평가가 되며 그 평가가 그 작품에 대한 정답 내지는 모범답안이 되어버린다. 시조단에서 반박 비평은 아주 드문 일이다. 시조평론가가 상대적으로 적어, 새로운 작품이 다 읽히지 못하는 탓도 있겠다.
발전이 있으려면 비평이 무성해야 한다. 해석의 과잉에 빠지거나 권위적인 비평으로 그 자체가 권력이고 우상인 비평, 터무니없는 비평으로 상처 받은 창작자들의 원한을 사서도 안 되겠지만, 지상에서 유일한 작품인 것처럼 부조하듯 잘 읽어주는 양상으로도 발전은 없다. 제대로 된 평론을 하려면 평론가는 외로워야 한다. 작가가 모이는 곳에 평론가는 가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서로 친해지면 제대로 된 평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리라. 그만큼 신중할 일이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비평이 귀한 현 시조단에서는 사실 혹평도 무관심보다는 반가운 일이니 시인은 평론가의 비평을 모쪼록 관심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비평가는 글 속에 숨긴 것들, 즉 쓰인 것들 이면에 쓰이지 않는 것들까지 읽어내는 좋은 비평에 임해주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협회 차원에서 연말에 <올해의 시조 비평상>이라도 만들어주면 어떨까. 해주는 것도 없이 많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참 염치없는 일이니 말이다. 또한 시조 신인만 발굴할 게 아니라 시조비평가의 등단 기회도 고려해주면 좋겠다. 남의 작품을 읽어주는 일은 쓰는 일보다 몇 배 힘든 일이다.
마지막으로 시집을 낼 수 있는 창구로 가기 위한 창작지원금에 관한 이야기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나눔’이다. 가을의 이삭줍기는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소작도 못 붙이는 가난한 마을사람들이 지주의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가는 것은 인정된 권리였다. 거칠고 굵은 손을 고단한 허리에 얹고 붉은 손으로 나락을 줍는 여인들. 배고픈 가족의 한 끼 저녁을 위해 낟알 한 톨이 절실한 아낙들을 보며 어쩌면 좀 더 그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지주는 일부러 낟알을 덜 모질게 긁어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본다.
창작지원금…, ‘지원금’이다. 꿈이 있어도 열정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그 꿈을 펼치지 못하는 창작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좋은 취지의 제도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의미에서 기회가 주어져야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책임을 나누어야할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시인’들께 솔선해주시기를 청한다. 물론 명예를 접어야하는 어려운 양보요 배려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것이며 존경받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경기도 수원 생. 2009년 <<유심>> 등단. 시집 『미안하다, 달』
<<화중련>> 2014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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