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많은 여자
이영혜
나를 입고 내가 두른 살들과 한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행이 다 들어와 있다는 내 사주팔자에도 필시
살(肉) 사이사이 마블링처럼 살(煞)이 끼어있음이 틀림없는데
내 안과 밖의 살들은 내 정신과 육체의 실존이어서
나의 상징이자 정체성이었던 볼살 허벅지살에
생존을 위한 애교살 애살에 엄살까지...... 더해가며......
살들과의 전쟁에서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모질지 못하여
한 근의 살도 쉽게 덜어내지 못했다
울 엄마 난산에 나, 몸에 피를 묻히고 태어났는지
도화살에 뭇 남자들이 던져준 난분분 꽃잎으로 쉬이 붉게 물들었고
역마살에 마음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절마다 가슴앓이, 고독과 벗해왔으며
백정의 드센 팔자라는 백호살에 손에 피 묻히며 살풀이하듯 살아왔다
하지만, 나
불화하던 오랜 살들과 조금은 화해하게 되었으니
볼살 허벅지살은 동안과 젊음의 대세가 되었고
도화살 덕분에 시인 이름 얻었을 것이고
역마살 타고 내 발걸음은 세상 저 멀리 달려나갈 것이며
외과 계통 의사들에게 백호살이 많다니
내 직업 선택을 자위함이다
차도르나 부르카 안에 내 안팎의 살 다 가리고
그대 앞에 서고 싶었으나......
나 이제, 늘어나는 뱃살 나잇살 주름살까지
영영 동행할 나의 실존으로 받아들이려 하니
살아 살아, 나의 살들아!
사라지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 살, 살, 살 더 잘 살아 보자꾸나
『시산맥』,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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