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나의 시

명랑, 사진관 가는 길, 목욕, 편도, 고치 / 김영주

꿍이와 엄지검지 2020. 5. 2. 11:52



명랑明朗*

 

김영주 


아버지 양복 주머니엔

늘, 명랑이 들어있었다 

 

늦둥이 내 호기심도

명랑만 보면 명랑해졌다

 

혹시나, 명랑 덕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명!

랑!

하셨다

 

 

지금은 어디서도 명랑을 팔지 않는데 

아버지 명랑없이도 그곳에서 명랑하실까

 

약국 앞 지날 때마다

궁금하다,

명랑


*1970년대 두통약. 겉봉에 "약을 먹으면 기명이 명랑해집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관 가는 길

 

김영주

 

서랍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꺼내봐요

어머니 고우시네요, 사진사가 그랬다죠

울엄마 기분 좋았겠네... 말없이 웃으셨죠

 

돋보기 코에 얹고 돌아앉은 얇은 등

사진 속 당신 얼굴 보고 또 쓰다듬고

다 늙어 곱기는 뭐가... 혼잣말을 하셨죠

 

사진관 가시면서 무슨 생각 하셨을까

깨질듯 부신 하늘

코끝 찡하셨을까

젖은 듯 웃는 얼굴이 흔들리네요 자꾸만

 

나도 곧 어머니처럼 카메라 앞에 앉겠지

할머니 고우시네요, 젊은 사진사 농을 하구요

두고 갈 사진이에요

아마 나도

그러겠지요



목욕

 

김영주

 

어머니 떠나시기 일주일쯤 전인가요

소풍처럼 즐겁게 목욕을 갔드랬죠

한사코 마다하시는 어머니를 업고요      

 

곡기(穀氣)를 끊으신지 얼마나 되었는지

어머니 업은 등이 빈 등처럼 허전해서

목욕탕 가는 길 내내 뒤만 자꾸 보았네요

 

순하게 몸을 맡긴 모타리 작은 우리 엄마

단발머리 호호 늙어 파꽃처럼 웃던 엄마      

꿈 같은 그날의 채비가

마지막이 될 줄은요

 

오늘도 그날처럼 목욕탕 거울 앞에서

좋아라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네요

나는 또 수도꼭지를

크게 틀어 놓습니다



편도(片道)

 

김 영 주


고등동집 앞마당 라일락 그늘 아래

비바람에 삭아져 다리 저는 평상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실까 먼산 보시는 어머니


뜰을 지나 담장 너머 그 너머 또 그 어디쯤

적적히 걸어가실 뒷모습이 보이는 지

갈 길이 믿기지 않아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청마루에 엎디어 걸레질하던 나는

어머니 뒷모습만 숨죽여 훔쳐보다

눈물로 흥건해지는 바닥만 자꾸 문지르다


모시고 가도 못할 아득히 먼 여행길

편도 차표 한 장 어머니께 끊어드리고

어머니 앉아가신 자리에

어머니처럼 앉아있다




고치


김영주


잠이 훌쩍 달아난 밤 집안을 서성이다

다락방 깊숙한 곳 묵은 상자 열어보고

내 편지 내가 읽으며 눈물이 쏟아집니다


수양산 너른 그늘 해저무니 간 데 없고

다시 못 올 길 가시며 붓을 놓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라는 아름다워 슬픈 필체


어머니 내 어머니

아버지 내 아버지

저 해님 저 달님은 그 무슨 아픔 있어

한 하늘 이고 살면서 한 데 살 수 없었나요


어머니 아버지도 가고 아니 계신 지금

나 또한 무엇에 쫓겨

내 몸 외롭게 두었는지

빈집을 홀로 지키던 어머니처럼 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