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明朗*
김영주
아버지 양복 주머니엔
늘, 명랑이 들어있었다
늦둥이 내 호기심도
명랑만 보면 명랑해졌다
혹시나, 명랑 덕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명!
랑!
하셨다
지금은 어디서도 명랑을 팔지 않는데
아버지 명랑없이도 그곳에서 명랑하실까
약국 앞 지날 때마다
궁금하다,
명랑
*1970년대 두통약. 겉봉에 "약을 먹으면 기명이 명랑해집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관 가는 길
김영주
서랍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꺼내봐요
어머니 고우시네요, 사진사가 그랬다죠
울엄마 기분 좋았겠네... 말없이 웃으셨죠
돋보기 코에 얹고 돌아앉은 얇은 등
사진 속 당신 얼굴 보고 또 쓰다듬고
다 늙어 곱기는 뭐가... 혼잣말을 하셨죠
사진관 가시면서 무슨 생각 하셨을까
깨질듯 부신 하늘
코끝 찡하셨을까
젖은 듯 웃는 얼굴이 흔들리네요 자꾸만
나도 곧 어머니처럼 카메라 앞에 앉겠지요
할머니 고우시네요, 젊은 사진사 농을 하구요
두고 갈 사진이에요
아마 나도
그러겠지요
목욕
김영주
어머니 떠나시기 일주일쯤 전인가요
소풍처럼 즐겁게 목욕을 갔드랬죠
한사코 마다하시는 어머니를 업고요
곡기(穀氣)를 끊으신지 얼마나 되었는지
어머니 업은 등이 빈 등처럼 허전해서
목욕탕 가는 길 내내 뒤만 자꾸 보았네요
순하게 몸을 맡긴 모타리 작은 우리 엄마
단발머리 호호 늙어 파꽃처럼 웃던 엄마
꿈 같은 그날의 채비가
마지막이 될 줄은요
오늘도 그날처럼 목욕탕 거울 앞에서
좋아라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네요
나는 또 수도꼭지를
크게 틀어 놓습니다
편도(片道)
김 영 주
고등동집 앞마당 라일락 그늘 아래
비바람에 삭아져 다리 저는 평상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실까 먼산 보시는 어머니
뜰을 지나 담장 너머 그 너머 또 그 어디쯤
적적히 걸어가실 뒷모습이 보이는 지
갈 길이 믿기지 않아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청마루에 엎디어 걸레질하던 나는
어머니 뒷모습만 숨죽여 훔쳐보다
눈물로 흥건해지는 바닥만 자꾸 문지르다
모시고 가도 못할 아득히 먼 여행길
편도 차표 한 장 어머니께 끊어드리고
어머니 앉아가신 자리에
어머니처럼 앉아있다
고치
김영주
잠이 훌쩍 달아난 밤 집안을 서성이다
다락방 깊숙한 곳 묵은 상자 열어보고
내 편지 내가 읽으며 눈물이 쏟아집니다
수양산 너른 그늘 해저무니 간 데 없고
다시 못 올 길 가시며 붓을 놓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라는 아름다워 슬픈 필체
어머니 내 어머니
아버지 내 아버지
저 해님 저 달님은 그 무슨 아픔 있어
한 하늘 이고 살면서 한 데 살 수 없었나요
어머니 아버지도 가고 아니 계신 지금
나 또한 무엇에 쫓겨
내 몸 외롭게 두었는지
빈집을 홀로 지키던 어머니처럼 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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