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유홍준

꿍이와 엄지검지 2009. 12. 20. 09:17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옷을 입은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 먼지를 한 번 오지게 뒤집어 써 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 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훌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

 

 

                     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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