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의 시조산책

[스크랩] 시조, 즐겨야 쉽게 써집니다

꿍이와 엄지검지 2018. 1. 30. 13:27

 

시조, 즐겨야 쉽게 써집니다

 

김영주

  

아는 게 박한 데 그 박한 것을 나누려하니 부득불 제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 기회로 삼고 이 방을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시조를 학문으로 접한 것이 아니므로

시조 창작자의 입장에서 제 창작 과정을 나누는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시조의 기본은 잘 아실 터이니 기초적인 내용은 가급적 반복하지 않고

드리고 싶은 말씀만 살짝 포스트잇 하겠습니다.

    

저는 종종 '시조'라는 명칭이 얼마나 과학적인가에 혼자 놀라곤 합니다.

때 시자를 쓰니 굳이 '현대'라 말하지 않아도 시조는 늘,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현대시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조는 여타 문학 장르보다도 그 감각이 뒤처져서는 안 되는 도전정신과 긴장감을

항상 안고 있어야겠습니다.


시조는 아시다시피
'3행의 정형시'가 아니고 '3612음보'의 정형시입니다.

    

제가, 이 지긋지긋하도록 자주 듣는 말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이유는 ''의 개념 때문입니다.

3장은 잘 지키는데 구의 개념에서 무너져 음보까지 허물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 때문에 시조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형식 안에 무리하게 구겨 넣지 않아도 앞구와 뒷구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말처럼 구슬리고 달래서 제 자리에 앉히기 쉬운 언어도 없습니다.

시조의 형식을 잘 다루며 거기다 내용까지 좋은 시조를 만나면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조에서의 ''는 천칭 위에 올렸을 때 좌우가 대비, 대칭, 대조 등을 이루는

전구와 후구의 균형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치고 뒤에서 받거나 뒷구가 앞구를 받쳐주거나 혹은 나란하거나,

올라갔으면 내려오거나 내려갔으면 올라오거나 해야 합니다.

또 앞구가 가벼우면 뒷구를 무겁게 하는 식으로 총량을 맞추기도 합니다.

 

'구' 안에는 널뛰는 모습도 있습니다.

살짝 구르면 살짝 튀어 오르고 쿵! 하고 내리 찍으면 하늘로 높이 솟아오릅니다.

반드시 중심점이 있구요. 양쪽이 균형을 이루어야 주고 받는 재미가 좋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균형'을 유지하며 시조를 쓴다면 잘 들어맞는 퍼즐을 맞추는 기분일 것입니다.

이 방에서는 주로 형식을 다루겠습니다.

    

꽃빛 만발

  

이남순

  

병원에 모셔놓고 장롱 서랍 열어보니

시큰한 눈물처럼 대장엄 사리밭처럼

울 엄니 베잠방이에 살구꽃이 만발했다

  

줄줄이 딸만 다섯 첫 봉급 받아 들고

젤 먼저 사다 드린 울 엄니 삼각 빤쓰

장롱 속 깊은 곳에다 꽃밭을 만드셨다

  

꽃샘잎샘 이겨내고 햇살 환한 봄날에도

가슴속에 깊이 묻고 꾹꾹 쟁여 숨겨왔을

아직도 뜯지 못한 울혈, 꽃빛으로 환하다

 

  

손증호

  

선생님 줄인 말로 아이들은 샘이란다

남도 억양으로 쌤이라고도 하는데

버릇은 없어 보여도 샘이란 말 참 좋다

  

그렇지 선생님은 샘이라야 마땅하지

깊디깊은 산골짝에 샘물로 퐁퐁 솟아

어둠을 길닦이하며 흘러가는 푸른 노래

  

눈비비고 찾아온 어린 짐승 목축이고

메마른 봄 들판을 푸릇푸릇 적시는

샘 같은 선생이라야 아이들 가슴 살아나지.

    

두 시 모두 전형적인 초중종 3장을 3행으로 배열했습니다.

콩닥 vs 콩닥, 주거니 vs 받거니, 구와 구가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남순 시인은 병상의 어머니 속옷을 챙기러 어머니 집에 왔다가

명절마다 사다드린,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울긋불긋 꽃무늬 빤쓰에 무너집니다.

그 무너지는 가슴을 다독이며 절제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인 3장 배열을 했습니다.

 

선생님에서 '메마른 봄 들판을 푸릇푸릇 적시는 샘'을 건져올린 손증호 시인 역시 3장을 각장 3행 배열했습니다.

보폭에 따라 행갈이를 달리 했다면 경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교사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샘'이 깊디 깊은 산골짝 샘물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런 연유로 얌전하게 3행으로 배열했습니다.

만약 글쓴이가 교사가 아니고 제 3자였다면 행갈이를 시도해서

말의 유희를 부렸다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부라는 이름의 시

  

변현상

  

대학병원 폐암 병동 금연 구역 휴게실

  

대롱대롱 흔들리는 링거병을 팔에 꽂은

  

중년의

마른 남자와

휠체어 밀던 아낙

  

깊은 산 호수 수면 그 잔잔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서로 불을 붙여준다

  

주위의 눈길을 닫는

저 뜨거운

합일合一!

    

첫 수의 초장부터 무겁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야하는 이 극한의 배역, 연극이라면 좋겠습니다.

면세점 담배 가게 앞에서 시중보다 싼 값에 파는 담배를 사 가고 싶은 욕심과

끊어라 하면서 담배를 선물로 사 가는 게 맞을지의 갈등은 갈등도 아닙니다.

생사여탈에 관한 일입니다.

'깊은 산 호수 수면 그 잔잔한 표정'에 이르러서는 부부가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아

결연하기까지 합니다.

누가 그 뜨거운 합일에 감히 입을 열겠습니까.

    

이 시는 두 번 다 종장의 첫 마디에 '의'라는 관형격 조사를 썼습니다.

종장 첫 마디에서의 '의'는 신중하게 쓰라고 백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뒤에 오는 둘째 마디 전체를 제한하면 무리가 없는데

둘째 마디의 한 단어에만 걸리면 음보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형식면에서 여섯 개의 연으로 행갈이를 했습니다.

시조에서 음보音步''걸음'보'입니다.

'걸음걸이'라면 평지를 걷다가 뛰기도 하고 언덕이나 계단을 숨찬 걸음으로 올라가기도 혹은 내려오기도 하므로

평탄하게 선비걸음 걷던 고시조와는 또 다른 현대시조만의 걸음새를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갈이에 대해 설이 분분합니다.

시조를 쓰는 사람은 시조를 한 줄로 쓰든 열 줄로 쓰든 시조를 가려낼 줄 압니다.

자유시를 3행으로 썼다고 해서 그게 다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행갈이는 파격이 아닙니다.

시인이 이렇게 음보를 조정한 이유는 자신의 시를 좀더 잘 전달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만났던 장순하 선생님의 전군가도」의 이미지와

그 신선한 충격의 보법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아래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이종문

  

그것참

  

희한하네

  

그 조그만 구멍에서

  

앞발이 나오더니

  

몸뚱이가 나오더니

  

뒷발이 빠져나오니

  

송아지네

  

세상에!

    

이윽고

  

그 송아지

  

뒤뚱뒤뚱 일어나서

  

거기가 거긴 줄을

  

대체 어찌 알았는지

  

어미의 젖꼭지 물고

  

젖을 빠네

  

세상에!

    

이 시는 열여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처 읽어서는 시 맛이 안 나므로 연으로 갈라 휴지休止를 두었습니다.

송아지의 출산을 지켜 본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한 템포 한 템포 놀라움의 경지입니다.

 

시조는 잣수가 정해져 있어 말을 아껴야 하므로 가급적 중복을 피해야 하지만

제목도 '세상에!'고 종장의 마지막 두 마디도 '세상에!'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수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처음 목격한 송아지 출산의 충격을

 '세상에!'라고 반복하면서 독자를 입 다물게 만듭니다.

 

이렇듯 행갈이는 자유시처럼 보이기 위한 꼼수가 아니라

시상이나 이미지의 배가를 위해 걷는 시인의 신중한 걸음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심자는 시조를 1년 정도는 정격으로 써 보고 시도하기를 권합니다.

    

오늘 네 편의 그림을 읽으셨습니다.

시는, 시조는 문자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재미있게 즐겨야 잘 써집니다.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게 써집니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김 영 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