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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 -1995년 / 김영주

고려장 -1995년 김영주 소포를 보내놓고 전화기를 찾아든다 우체부가 가는 날은 햇살도 부산하리 반가워 어쩔줄 몰라할 엄마의 환한 얼굴 라면을 끓이다가 실리카겔을 넣었단다 조미김에서 빠져나온 네모난 비닐쪼가리 울 엄마 거미 같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겠다 "도무지 뭐가 뭔지 보여야 말이지야“ 암시랑토 않다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 "아이참 잘 좀 보시잖구…" 산다는 게 서러웠다 <시조정신>2021 하반기호

좁은 방 이야기 / 김영주

좁은 방 이야기 - 1979년 김영주 엎드려 책을 보다 "엄마 커피?" 묻는다 문안장*이나 가야 사는 미제 맥심 커피에 설탕을 달게 떠 넣고 크림도 듬뿍 푼다 두 개의 머그컵을 한 손에 움켜잡고 내 커피 엄마 커피 맨바닥에 내려놓자 "쯧쯧쯧, 방이 좁냐아?" 혀를 끌끌 차신다 기우뚱 잔 두 개가 서로 버텨 바닥이 떴다 귀여운 우리 엄마 시크한 유머감각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막둥이 난 스무 살 엄마랑 내가 웃던 사십 년 전 이야기다 늦둥이 나를 갖고 마흔이 서러웠다던 "너 없이 어찌 살았을꼬…." 엄마 없이 나 산다 *남문시장. 수원에 네 개의 성문이 있는데 그 성문 안에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문안(門內)장이라 불렀다. 2021 가을호

괄호 속의 존재감 / 김영주

괄호 속의 존재감 김영주 있어도 그만 아닌 없어도 그만 아닌 두근두근 심장 속에 옹이처럼 박힌 말 웅크려 껍데기 쓰고 하소하듯 숨은 말 간곡히 하고픈 말 시침 떼고 들어앉아 그 정체 모호해도 물어보긴 또 애매한 허투루 뺄 수도 없는 은근슬쩍 심각한 말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베일 속의 속삭임 정녕코 두려운 건 스스로 두른 울타리 가끔은 들켜도 좋겠다 허울 벗은 민낯을 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