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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 / 김영주

느티 김영주 첫 아이 낳던 그날 보호자 서명란에 또박또박 눌러쓴 당신의 이름 석 자 든든한 느티나무처럼 그 그늘 아늑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부모로 익어가며 큰아들 작은아들 보호자로 사는 일도 마땅히 누려야 하는 특권으로 알았다 살면서 아웅다웅 너 먼저 가, 나 먼저 가 지지고 볶던 일이 새삼스레 서럽다 넘치는 분복인 것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꿈에도 이런 날은 오지 않길 바랐지만 태어나면 늙는 걸 늙으면 병드는 걸 숙제를 다 마쳐야만 비로소 안식인 걸 호흡기만 저 혼자 쌔액쌕 숨을 쉰다 이저승 경계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그 고통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차마 없다 감당 못 할 무거움이 사치처럼 밀려온다 살아줘 고맙단 말 혼몽에라도 듣는지… 오늘은 보호자란에 내 이름을 눌러 쓴다 2021 연간지

제야 / 김영주

제야 김영주 신사역 8번 출구 전단지 아주머니 필라테스 오픈점 광고지를 돌린다 건네다 놓친 종이들 길바닥에 누웠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갈등은 깊어지고 주머니에 숨은 손은 나왔다 들어갔다 스치는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들 머리 텅 비우고 시킨 듯이 받아들자 추위에 떨고 있던 고맙다는 아, 목소리 싸늘한 종이 한 장의 묵지근한 그 울림 2021 겨울호

쉴낙원 / 김영주

쉴낙원 김영주 출근길엔 안 보이고 퇴근길에 보이는 가로수에 반쯤 가려 여차하면 숨어버리는 갓길로 천천히 가야 희뜩번뜩 보이는 이름 한번 고즈넉해서 볼 때마다 피식 웃는 모텔 집 간판 치곤 그런대로 점잖은 무심코 지나갈 때는 잊었다가 아, 하는 저 작명 누가 했을까 궁금증 동하다가 어느 날 에그머니나, 깜짝 놀라 다시 보니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영면을 빌겠다'는 쉴낙원 쉴이란 게 그 쉴이 아니었다 쉴낙원 그 깊이를 내 함부로 웃다니 쉴낙원 그 망망함을 눈물 없이 읽다니 그대여, 이 가벼움 마음에 두지 마소 그리라도 웃었음은 님을 위한 헌사요 당신도 웃으며 가소 가볍게 가볍게 가소 <시조21> 2021 가을호 - 50인50색

고려장 -1995년 / 김영주

고려장 -1995년 김영주 소포를 보내놓고 전화기를 찾아든다 우체부가 가는 날은 햇살도 부산하리 반가워 어쩔줄 몰라할 엄마의 환한 얼굴 라면을 끓이다가 실리카겔을 넣었단다 조미김에서 빠져나온 네모난 비닐쪼가리 울 엄마 거미 같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겠다 "도무지 뭐가 뭔지 보여야 말이지야“ 암시랑토 않다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 "아이참 잘 좀 보시잖구…" 산다는 게 서러웠다 <시조정신>2021 하반기호

좁은 방 이야기 / 김영주

좁은 방 이야기 - 1979년 김영주 엎드려 책을 보다 "엄마 커피?" 묻는다 문안장*이나 가야 사는 미제 맥심 커피에 설탕을 달게 떠 넣고 크림도 듬뿍 푼다 두 개의 머그컵을 한 손에 움켜잡고 내 커피 엄마 커피 맨바닥에 내려놓자 "쯧쯧쯧, 방이 좁냐아?" 혀를 끌끌 차신다 기우뚱 잔 두 개가 서로 버텨 바닥이 떴다 귀여운 우리 엄마 시크한 유머감각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막둥이 난 스무 살 엄마랑 내가 웃던 사십 년 전 이야기다 늦둥이 나를 갖고 마흔이 서러웠다던 "너 없이 어찌 살았을꼬…." 엄마 없이 나 산다 *남문시장. 수원에 네 개의 성문이 있는데 그 성문 안에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문안(門內)장이라 불렀다. 2021 가을호

괄호 속의 존재감 / 김영주

괄호 속의 존재감 김영주 있어도 그만 아닌 없어도 그만 아닌 두근두근 심장 속에 옹이처럼 박힌 말 웅크려 껍데기 쓰고 하소하듯 숨은 말 간곡히 하고픈 말 시침 떼고 들어앉아 그 정체 모호해도 물어보긴 또 애매한 허투루 뺄 수도 없는 은근슬쩍 심각한 말 비밀인 듯, 비밀 아닌 베일 속의 속삭임 정녕코 두려운 건 스스로 두른 울타리 가끔은 들켜도 좋겠다 허울 벗은 민낯을 2021 가을호

0세권 / 김영주

0세권* 김영주 역세권 숲세권 학세권 다 옛말이다 편세권*에 팍세권 도세권에 토세권 병세권 주세권 정도는 슬세권에 밀린다 바다 전망 해세권 호수 조망 호세권 스타벅스 스세권 맥도날드 맥세권 붕어빵 붕세권 위에 호떡 있다 호세권 다 있어요 다세권 도시인프라 옆세권 욕 많이 들을수록 집값 올라 욕세권 강아지 산책코스도 당당하게 견세권 빈손으로 왔다가 빈주머니로 가면서도 몰세권 쓱세권에 목을 매는 사람들… 도심 속 장례식장은 연중무휴 성업 중 * 도보로 5~10분 거리에 주요시설 이용 가능한 곳 * 편세권(편의점), 팍세권(공원), 도세권(도서관), 토세권(토스트, 토익), 병세권(병원), 주세권(술), 슬세권(슬리퍼 생활권), 몰세권(쇼핑몰), 쓱세권(쓱배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