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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시인의 시집 <<언제나 스탠바이>>

비상구 탱고 이나영 물걸레 빨아 널고 고무장갑 벗어내고 비상구 계단에서 빵 한 쪽 뜯고 난 뒤 화장실 한쪽 구석에 밴 땀을 말린다 보이지 말란 말에 갑갑한 숨을 잡고 환경도 미화도 없는 지하로 내몰리고 참았던 마음 쏟듯이 쓰레기통 비워낸다 반도네온 리듬으로 저들의 목청 속에 거친 숨 몰아가며 오랫동안 춤을 춘다 악센트 발끝에 실어 찌든 날 걷어찬다 책만드는집 2020

김나비 시인의 시집 <<혼인비행>>

로봇청소기 김나비 예약된 또 하루가 조용히 눈을 뜬다 친구가 없는 나는 은둔형 외톨이 사람들 떠난 냄새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간단한 질문에는 표정 없이 답을 하고 사지를 웅크린 채 어제를 찾아가며 먹어도 자라지 않는 바코드를 읽는다 분주한 발소리가 문밖에 흩어지면 내 속에 숨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남들은 내 머릿 속을 먼지 통에 빗댄다 혼놀*은 내 운명에 새겨진 검은 지도 익숙한 외로움이 틀 안에 맴을 돌 때 재빨리 몸을 숨기고 충전대로 향한다 *혼잣 놂, 또는 그렇게 하는 놀이 발견 2020

이용식 시인의 시집 <<우포늪 가시연꽃>>

휴대전화 문자 이용식 전화 오면 깜작 놀라 문자 보기 겁이 난다 왜들 연락 없이 갑자기 떠나는지 이왕에 떠나가려면 우정마저 거둬주오 전화해도 받지 않아 하고픈 말 놓쳐버린 당연히 만나리라 믿었는데 허망하다 다음 생 혹 만나시면 알은체나 해 주오 이슬방울 이용식 하루는 길고 길어도 일 년은 잠깐이다 시작이 곧 끝인 것을 슬어지는 이슬을 본다 풀잎이 목을 적신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토방 2020

이남순 시인의 시집 <<봄은 평등한가>>

웃골댁 양파농사 이남순 천 평 남짓 남새밭을 산 채로 갈아엎자 들녘을 덮어오는 울음 끝이 싸아하다 모종값 포기하고도 품삯조차 못 건지니 풍년이 죄라더라, 죄명 한번 얼척없다 못 거둔 가슴팍에 순장시킨 내 새끼들 땀흘려 가꾼 농사가 꼼짝없는 벌(罰)이라니 뉘 눈물 나 몰라라 냉랭한 뉴스 앞에 아무일 없는 듯이 하루가 저무는데 노을만 피멍 든 얼굴 하늘 끝에 부빈다 씨종자 이남순 지 엄니를 쥐 잡듯이 했다네요 돈 달라고, 오메는 좋겠네요, 그럴 아들 없으니깐 뭔 말을? 두들겨 맞더라도 씨종자는 있어야제 문학의 전당 2020

고성만 시인의 <<파란 . 만장>> 고요아침

개 고성만 소리조차 가는 비 가슴 적신 봄날 아침 팔짝팔짝 검둥개 밥그릇 채우면서 너 어찌 내 속을 알랴 중얼중얼 어머니 포클레인 고성만 붉은 바퀴 자국을 새기며 달려간다 피는 차고 거친 호흡 망설임도 후회 없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 표표히 떠나는 그 공사장 뒤 모퉁이 서럽게 울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떠서 담는 밥그릇 목숨이 부대낄 때면 기어서 다가간다 고요아침 2020

유선철 시인의 시집 <<찔레꽃 만다라>>

빙어의 설법 유선철 너희가 나를 먹느냐 산 채로 씹어먹느냐 은하처럼 푸른 물에 빙하보다 맑은 생각 너희가 나를 먹느냐 씻지 못할 죄를 먹느냐 단풍 죽이기 유선철 직지사 관음전 앞 난데없는 소란이다 앙큼시런 빨간 장갑 이년이 범인아이가 노란치마 팔 랑거리는 저년도 공범인기라 시님요, 저짜로 가이소 야들 땜에 눈 배리겠심더 참말로 같짢데이 여어가 어데라고 작 년에도 심하디만 올핸 더 지랄이네 시님요, 불싸질러뿌까 요 버리장머리 확 뜯어고치게 노보살 고함소리에 산도 절도 어리둥절 찔레꽃 만다라 2020

윤수천 선생님이 읽어주신 [생각하며 읽는 동시] 욕실 슬리퍼 / 김영주

경기일보 [생각하며 읽는 동시] 욕실 슬리퍼 윤수천 욕실 슬리퍼 김영주 바르게 신어도 짝짝이로 보이고 고쳐서 신어도 짝짝이로 보인다 고것 참 희한하게도 벗어놓으면 맞다 욕실 슬리퍼는 대체로 오른쪽 왼쪽이 분명하지 않다. 오른쪽인가 싶어서 신어 보면 왼쪽인 걸로 보이고, 왼쪽인가 싶어서 신어 보면 오른쪽인 걸로 보인다. 왜 욕실 슬리퍼는 이처럼 불분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짐작건대, 실내화인 만큼 수월하게 신으라고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 세상을 살다 보면 굳이 오른쪽, 왼쪽을 따지지 않아도 좋은 경우가 참 많다. 오른쪽이면 어떻고, 왼쪽이면 어떤가. 그냥 신발이면 좋듯이 굳이 따지지 않아서 좋은 게 많다. 오히려 명확하게 한다고 하다 보면 편을 가르게 되고 심하면 적을 만드는 경..

♡♡/발표동시 2020.07.01

궁평리에서 / 김영주 (제2회 이달의 낭송하기 좋은 시 - 한국시낭송협회 낭송시 수상)

tv.kakao.com/embed/player/cliplink/25542549@my?service=flash&alert=true' 궁평리에서 김영주 우리는 천천히 방파제를 걸었다 사랑을 몰랐던 바다를 몰랐던 그 때 그 어린 시절 가질 줄 몰랐던 나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약속 그러나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그렇게 천천히 노을을 향해 걸어갔다 격조한 세월 앞에 이야기는 툭툭 끊겨 나는 이따금 부풀린 몸짓으로 나를 들켰지만 너는 아버지처럼 너털웃음을 웃었고 나는 아직도 열여섯 계집애처럼 두근거렸다 오늘 하루도 리허설이라고, 너는 삶에 무슨 리허설이 있느냐고, 나는 어제는 오늘을 위한 오늘은 내일을 위한 연습이었노라고 넌 말했다 어디쯤 가고 있었을까 한번도 연습을 모르고 살아온 나와 날마다 연습처럼 살아온 너와..

어떤 슬픔

어떤 슬픔 김영주 옛님이 그랬다지 마흔은 불혹이라고 철없이 덜컥덜컥 나이만 먹던 그땐 천지에 널린 것들은 혹한 것들 뿐이던데 기적이라 말할까 살아보니 살아낸 일 희로애락 애오욕 칠정에도 무덤덤한 광풍도 어쩌지 못하는 돌기둥 같은 나를 본다 따뜻이 이름 불러 보듬어주지 못했던 거울 앞에 마주 앉은 저 슬픔 낯이 익다 어느덧 엄마를 닮은 늙어가는 내가 있다 ㅡ『정형시학』 2020 여름호

홍성란_시는 그럴 수 없다 (발췌) 아마존복지금/김영주

시는 그럴 수 없다(발췌) _ 홍성란 / 시인 아마존복지금 김영주 가난하냐 물어보고 가난하냐 물어본다 가난하냐 다시 묻고 가난하냐 또 묻는다 묻고 또, 죽을 만큼 묻고 죽지않을 만큼 주는 돈 시는 그럴 수 없다(발췌) _ 홍성란 / 시인 아마존복지금은 '아마존 정글처럼 생존만이 가능한복지라는 뜻에서의 저소득층지원금'을 가리킨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유엔은 빈민에게 필요한 사회복지의 자격조건.조사의 강화를 '빈곤의 형벌화' 조치로 분류하고 있다는데 이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난하냐"를 네 번 반복하고 이 '묻는다'는 행위를 여섯번 반복한다. 강조하고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니 '가난/묻다/죽다/죽지 않다/돈' 이 다섯 마디의 어휘를 변주하고 함축含蓄하고 있는 바, 담당공무원의 질문 앞에서 기초..

♡♡♡/리뷰 20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