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 신필영 북한산이 어떠냐는 고향친구 불러와서 모닥불 가을이 남은 우이령 길 함께 갔다 엇갈려 타관인 날들 구김살을 펴가면서. 두다 만 바둑판 헛집도 같은 쓸쓸함을 잔술로나 씻어보는 객기는 아직 맞수 우리는 해묵은 가양주 그 빛으로 익고 있었다. - 신필영, <해후> 전문 ♡♡♡/시인의 시 2009.12.20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옷을 입은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 ♡♡♡/시인의 시 2009.12.20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 ♡♡♡/시인의 시 2009.12.20
몰현금(沒絃琴) 한 줄 / 조오현 몰현금(沒絃琴) 한 줄 조오현 사내라고 다 장부아니여 장부 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놓았다 다 들어 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시인의 시 2009.12.20
어떤 나이테 - 못 / 송선영 저 못이 제 나이조차 늘 잊고 사는 듯해 빗방울, 골 바람이 애써 테를 새겨 주지만 까짓것 부질없다며 짐짓 지워온, 千秋(천추). - 송선영, <어떤 나이테-못> 전문 ♡♡♡/시인의 시 2009.12.20
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 ♡♡♡/시인의 시 2009.12.20
연극 공연장에서 / 오종문 아느니,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것 무희의 그 춤사위 아득히 날 깨우치고 사랑도 버거운 한낮 뒤뚱거릴 뿐이다. 알지 못한다, 언제 우리 목숨 끝나는지 몇 개 탐스런 욕망 지상에 널어놓고 내 몫의 한 다발 고통 그만 버틸 일이다. -오종문, <연극 공연장에서> 전문 ♡♡♡/시인의 시 2009.12.20
골목안 풍경 / 문인수 미장원 앞 사과상자엔 또 부추가 새파랗게 자랐다. 전에 베어낸 자리가 아직 덜 아물었다. 자욱하게 소름 끼친 것 같다. 그 칼자국이 밀어올린 키 위에다 소금 뿌린 듯 희고 자잘한 꽃이 피어 햇살 아래 지금 한껏 이쁘다. 가명의 저 어린 창녀들, 여럿이 새파랗게 몰려 한꺼번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 .. ♡♡♡/시인의 시 2009.12.20
붓 끝으로 그린 풍경 /데이빗 맥켄 일전에 까페 개편 전에 보았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없군요. 2008년 문학사상 10월호에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붓끝으로 그린 풍경>을 보고 반가워 올립니다.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우리 말의 멋과 우리의 정서와 시조의 리듬을 잘 살릴 수 있었을까 탄복하였었는데 교수님이 지나가신 흔적 덕.. ♡♡♡/시인의 시 2009.12.20
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 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고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줄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 ♡♡♡/시인의 시 2009.12.20